나 어려서는 밥을 지으려면 우선 쌀을 씻은 후 돌을 골라내기 위해 조리로 일었다. 밥 한번 지어보지 않고 곱게 자라 시집온 새댁은 조리질을 잘 못해 밥상에서 시아버지 돌 씹을 때마다 민망한 일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 부엌에서 '조리'가 사라졌다. 아예 기계로 돌을 고른 쌀이 시장에 나왔기 때문이다. 동네 쌀가게에 처음 '돌 고른 쌀'이 등장했을 때는 참 신기하기도 했다. 조리질을 안해도 되는 쌀이 나왔으니 주부의 귀찮은 일이 한가지 덜어져 좀 비싸더라도 그 쌀을 사먹었다.
그러나 밥 짓기의 진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술은 날로 발전하더라. 다음에는 씻지 않아도 되는 쌀이 나온 것이다. 포장을 풀어 물만 부으면 되는 '씻어서 나온 쌀'이 등장한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들에게는 밥 짓기의 시간이 또 한 코스 줄어들었으니 이 또한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물 부을 필요도 없는 쌀이 나왔다. 아예 밥으로 지어 1인분씩 용기에 담아 나온 것이다. 전자레인지에 2분만 돌리면 되는 것이니 밥 짓기에 들어가는 시간은 1시간여에서 단 2분으로 단축되었다.
나같이 직장생활하며 집에서 밥 먹는 횟수가 적은 사람에게는 더 없이 좋은 상품이었다. 그 상품이 나온 후 나는 아예 밥솥은 상자에 집어넣어두고 그 제품만 한 상자씩 사서 두고 필요할 때마다 한개씩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다. 집에서 밥 먹는 경우가 적은 나는 쌀로 밥을 지어 먹을 때는 한번 지은 밥을 여러 날 먹어야 하니 상해서 버리는 경우도 있으므로, 오히려 좀 비싸더라도 지어놓은 밥을 사먹는 것이 버리는 일 없어 경제적이라고 생각했다.
비단 밥 짓는 일뿐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은 모든 면에서 몇십배로 단축되어가고 있다. 그러면 그만큼 사람들은 시간이 남아돌아 여유 있게 살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점점 더 바빠지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남아돌아야 할 시간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와 살면서 어떤 것이 제일 좋으세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물론 좋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내가 아주 만족해하는 것 중 하나는 도시생활에 비하면 '한없이 느리게 산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수세미를 하나 만들었다. 나는 이 수세미 하나를 취해서 쓰기 위해 지난 6개월을 준비했다.
그리고 나는 지난 4월 수세미 씨앗을 심었다. 이어 싹이 나오고, 뒷산에 올라 대나무를 잘라다 수세미가 타고 올라갈 지지대를 만들어주고, 6월 되니 수세미 꽃이 피고, 8월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하더니 무럭무럭 자라주었다. 10월 들어 완전히 영근 놈 하나를 따서 껍질을 벗기고 수세미 모양을 갖춘 하얀 속을 푹푹 삶아 부드러운 수세미로 만든 것이다.
시간이 돈인 도시 사람들이 보면 저 짓을 왜 하나 하겠지. '얼른 한개 사서 쓰고 그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지….'
그러나 도시에서 생각하는 생산적인 일이란 것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생산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매우 소비적인 일인 경우가 많다.
요새 나는 먹을 것 하나를 얻기 위해 적어도 3개월 또는 6개월, 아니 때에 따라서는 1년을 걸려 준비하는 삶을 살고 있다. 꽈리를 만들어 불고 싶어 지난 4월 씨앗을 심고 4개월을 기다린 끝에 8월이 되어서야 드디어 하나를 따서 정성껏 속을 파내고 완성해 입안에 넣고 뽀드득 뽀드득 불었다. 그때의 그 만족감이란….
'바로바로' '즉시' '되도록 빨리'…. 이런 말들을 입에 붙이고 살던 내가 이제는 6개월 후에 얻을 것을 생각하며 지금 준비한다. 그렇게 바쁘게 살던 때는 시간이 휙휙 너무 빠르게 지나가더니, 지금 이렇게 느리게 살아보니 시간은 천천히 나와 놀며 흐르고 있다. 빠르게 산다고 해서 주어진 시간이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바삐 살 필요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