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세상 향해 커가는 '작은 리더'
소학교 때 한번은 담임선생님이 똑바른 자를 아이들에게 보이며 "영숙이처럼 이렇게 바르게 생활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똑바른 생활, 말수는 적지만 자신의 의견을 야무지게 표현할 줄 알았던 아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슴에 새겼던 작은 리더는 더 큰 세상을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여학교시절 정인보 선생 만나 영어와 신앙에 큰 영향
공산치하가 된 북쪽에서 남쪽으로 와 작은아버지가 사단장으로 계시던 전남 광주에서 여학교를 다녔다. 작은아버지가 무척 귀여워하는 조카딸이기도 했지만 작은아버지의 모습을 판박이해서 학교 때는 극장구경도 제대로 못갔다고 한다. 작은아버지와 너무 닮아 어디를 가든 눈에 띄기 때문에 행동거지를 스스로 절제했던 박영숙은 작은 거인으로 수업을 쌓아갔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의사가 되려는 영숙을 걱정한 작은아버지의 조언대로 영문과 준비를 다시 하면서 그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정인보 선생(국문학자 정인보 선생과는 동명이인임)을 만났다. 영어를 잘하고 철저한 준비를 시키던 정인보 선생에게는 영어교육뿐 아니라 신앙적인 영향도 받았다. 여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영어교과서를 완벽하게 암기시키며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분량을 다 외우지 못하면 몇번이고 다시 시키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다. 정 선생은 스웨덴보르그의 영성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월남해 전남여고에 재학 중이던 1948년 10월 군 내부에서 폭동이 일어나 반란군들이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다. 경찰서, 행정 청사, 주요 시설을 장악하며 인민대회, 인민재판 등이 개최되자 박영숙은 공포에 떨었다. 일본이 망해 조국의 해방을 만주에서 맞았던 박영숙은 조국 해방의 기쁨이 식기도 전에 수탈과 분노에 찬 폭도들로부터 폭력의 위협을 겪었다. 공산치하가 된 조국에서는 강압과 처벌, 분노의 정치로 인해 두려움 속에 살았는데 다시 한번 그 시절이 재현되는 것 같아 바깥출입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혼란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입시준비로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대학 재학 중 6·25전쟁을 겪었다. 박영숙 세대의 모든 사람들은 크고 작은 전쟁 속에서 살았지만, 박영숙 또한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유년과 청춘을 보냈던 것이다.
YWCA 활동하며 적극적인 구제사업…"내 꿈은 '공적인 어머니'"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멋을 내고 낭만에 잠기는 평범한 여학생은 아니었다. YWCA 활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하면서 민족과 민중을 가슴에 품은 열사였다.
그는 소학교 시절 친구들과 놀며 자신의 꿈은 "공적인 어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인생에서 한번 겪을까 말까 하는 사건들 속에서 잊었을 법도 한 꿈이 심장 한 부분이 되어 숨결처럼 살아있었던 것 같다. 전쟁 중엔 YWCA 활동을 통해 전쟁고아와 피난민들을 도우며 모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학시절 내내 여름 및 겨울방학에는 농촌 계몽활동을 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하곤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부족하여 아예 한 학기를 휴학하고 지역에 내려가 무료로 영어를 강의했다.
개인보다는 민중, 이웃이 우선이었던 그의 삶은 YWCA에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활약했다. 충직하고 지혜로웠던 그의 또 한분의 스승은 박에스더 선생이었다.
박에스더 선생은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하와이로 이주, 하와이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YWCA 연합회 국제부에서 활동하였다. 박에스더는 1947년 대한YWCA 고문총무로 임명된 뒤 1980년 하와이 양로원으로 떠날 때까지 여성 직업훈련 및 지도자 양성에 힘쓰며 한국YWCA 행정체계를 확립하고 지방 YWCA를 신설하였다.
이후 여성교육과 계몽교육, 빈민구제사업에 헌신하면서 한국 여성운동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박에스더 선생은 충실하고 지혜로운 박영숙을 눈여겨보며 장차 YWCA를 이끌어갈 큰 재목으로 여겼다. 박에스더 선생은 박영숙에게 학교를 졸업하면 자신의 밑에 와 일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박에스더 선생이 미국에 가 있을 동안 학교를 졸업하게 된 박영숙은 당시 학생처장이었던 송은숙 선생으로부터 학교에 남아달라는 청을 듣게 된다. 신의를 중요시하던 박영숙은 박에스더 선생과 선약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귀국한 뒤 직접 여쭙고 답하겠다고 했다. 여기서 박영숙의 순진하면서도 고지식한 사건이 발생한다.
박에스더 선생이 귀국하던 당시는 입국자들을 환영하기 위해 여의도 비행장 비행기 트랩까지 갈 수 있었는데, 트랩에서 내리시는 선생님을 보자마자 박영숙은 "제가 학교에 남을까요? YWCA에 갈까요?" 하고 물었다 한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사건이지만 박에스더 선생은 단순한 한마디로 "YWCA에 와야 한다"고 했다 한다. 그래서 훈련간사부터 시작해 총무, 실행위원 등 회장만 못하고 모든 직책을 다 섭렵했던 것이다.
연애사건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연애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주변에서 박영숙 선생에게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었지만 몇 마디 나눠보면 바닥을 볼 수 있어서 재미없었다며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공적인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열정적인 처녀의 참 애인은 이웃과 민족을 향한 연민과 애정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도 한편의 기억에 남는 연애 이야기를 하셨다. '민들레'라는 필명으로 몇년을 답장도 하지 않으시는 선생님께 애정의 편지를 보냈던 이야기를. 연애 이야기 치고는 너무 단순해서 내 질문이 조금 무색해졌다.
인생의 스승이요, 동지였던 남편 안병무 선생과의 사랑 이야기도 정리정돈을 잘 하시는 박영숙 선생의 스타일로 이야기했다.
강연도 잘 하고 글도 잘 쓰는 나이 많은 독신주의자(?) 안병무가 어느 날 한강 고수부지로 불러내 "병환 중에 계신 어머니가 결혼하기를 바라시니 나와 결혼해주시오"라고 하더란다. "독일 유학까지 한 사람의 프로포즈가 그 정도입니까?"라며 박영숙은 한 마디로 거절했다. 독신주의자인 줄 알고 마음 놓고 대화하고 편하게 만났던 안병무 선생에게 받은 다듬어지지 않은 프로포즈에 내심 놀랐고, 결혼할 준비도 되지 않아 거절부터 했지만 결국 그의 평생 동반자가 되기로 승낙했단다.
박영숙 선생이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평생의 조언자요 울타리인 안병무 선생과 결혼한 것이고, 진정한 기도를 가르쳐준 스승이 있다면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이라고 했다.
숱한 고난과 희망의 세월을 함께 하며 박영숙을 민중의 어머니가 되게 한 안병무는 박영숙의 평생의 멘토였다.
남편 안병무 선생은
1922년에 평남 신안주에서 한의사 안봉식의 맏아들로 태어나 간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한국전쟁의 민족적 비애와 더불어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 공동체운동을 전개하면서 <야성>을 출간한 민중의 신학자이며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안 선생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 1969년에는 월간지 <현존>을, 1973년에는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계간지 <신학사상>을 비롯한 신학계 전문 학술서적들을 간행하면서 한국 교회에 근대 서구 신학을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반독재 민주화 학생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라는 이유로 1975년에 한신대학교 교수직을 박탈당했고,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3·1 민주구국선언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옥 후에는 '거리의 신학자'로 살아가면서 민중의 고난에 깊이 천착한 민중신학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시대와 민중의 증언자로서 서구 부르주아신학에 도전하여 민중신학을 세계 신학계에 널리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1996년 10월19일에 소천할 때까지 왕성한 집필활동과 함께 민중신학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강의를 놓지 않았다. <해방자 예수>, <역사와 해석>, <성서적 실존>, <갈릴레아 예수> 외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