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질·연습·실연…‘수도자’처럼 올인
국립극단 최연소 여성 단장으로 맹활약
“모든 역에는 크고 작음이 없다”는 러시아 쉐프킨의 연기관에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배우술까지. 백성희의 연기론은 이들에 닿아 있다.
1972년, 사상 최초로 직선제로 뽑은 국립극장단에 최연소 여성 단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70~80년대 침체기를 거치고 91년 다시 단장 재임.
체계적인 연극 시스템 구축을 위해 과감한 비전을 내놓기 시작했다.
처음 연극을 시작하며 불호령을 내리던 아버지 앞에서 연극 말고는 할 것이 없다고 답한 것처럼 그녀는 평생 연극 말고는 할 것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누구보다 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누구보다 뛰어난 천재적인 배우였지만 그녀는 늘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닦아갔던 연극이라는 수도원의 수도자였다.
늘 성실하고 올곧게 연극에만 매진
“단 한번도 배역 타박한 적 없었다”
사무엘 쉘던은 배우의 세 가지 조건은 천부적 자질, 연습, 실연(實演)이라고 했는데 백성희가 그러했다. 평생 연습시간에 늦는 일이 없었고, 어떤 악조건에서도 철저히 연습했으며, 그에게 있어서 연극은 늘 모든 것에서 첫번째 자리였다. 인생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올인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잘 갖추어져 탄탄대로를 달리는 일이라 해도 더 나은 곳을 향해 기웃거리는 것이 인간의 생리인데, 현대는 그렇게 기웃거리며 더 좋은 것을 향해 업그레이드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백성희는 실패한 사람인가? 연극에 올인했으니까.
“나는 오늘까지 연극을 해오면서 작품은 가렸지만 단 한번도 배역을 가려본 적이 없다. 주어지는 배역이면 무슨 역이든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그녀의 자전적 고백은 백성희의 배우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녀는 연극을 시작하던 날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인물을 분석하고 “자신을 작중인물화”했지만 진정한 인물 창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연기생활 10년이 지난 뒤부터였다. <나도 인간이 되련다>(유치진 작)에서 한국인과 소련인 사이에서 태어난 나타샤 김이라는 역을 맡았을 때, 천박하고 야비하고 이기적인 나타샤 김을 재창조하여, 그녀의 천박하고 잔인한 근성 밑에 도사린 약하고 고독하고 순정적이기까지 한 내면을 그려냈다. 그녀는 작중인물을 분석하고 그 인물을 재탄생시키는 것이 배우라고 생각했고, 배우는 극중인물들이 다시 태어나는 자궁이라고 여겼다.
사실주의극의 철저한 신봉자로 평가
“배우란 액체…늘 머릿속에 빈그릇 준비”
그녀의 연기관은 “배우의 기능은 희·비극에 관계없이 인물을 재현하는 것이고, 그 인물의 모델을 실생활에서 발견함으로써 믿음성 있고 정직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모든 역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며, 단지 배우의 크고 작음이 존재할 뿐이다. 모든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역을 서로 조화시켜 전체의 작품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19세기 후반 러사아에 리얼리즘 연기를 도입한 쉐프킨의 사상을 연상시킨다. 작중인물의 재현을 연기로 보았던 쉐프킨의 연기관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배우술로 이어진다. 백성희의 연기관은 이들과 맥이 통한다.
그녀는 자기 삶 주변에서 모델을 찾아 치밀한 관찰을 거듭함으로써 자신이 맡은 역을 완벽하게 창조하며 혼신을 힘을 기울였다. <만선>의 구포댁, <무녀도>의 모화. <나도 인간이 되련다>의 나타샤 김을 재현하기 위해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의 언어와 몸짓을 익히며 작중인물들 속에 녹아 들어갔다. 그녀는 “배우란 액체 같은 존재다. 그릇에 담기면 그 그릇의 형태로 변형되는 액체여야 한다. 배우인 나는 머릿속에 빈 그릇을 준비해둔 액체다”라고 표현한다.
백성희는 “사실주의극의 철저한 신봉자”라고 연극평론가 유민영은 말한다. 그녀가 아직 풋내기였을 때 스타니슬라프스키의 글을 일본어로 정독하면서 철저한 자기 훈련을 한 것을 일생에 걸쳐 완성시켜간 사실주의극의 등대지기이다.
유치진의 지휘 아래 있던 현대극장을 통해 연극인으로 입문해 이해랑이 이끌었던 신협, 그리고 국립극단으로 이어지며 한국 신극의 본류를 지켜온 그는 철저한 리얼리스트이다.
다른 연극인들이 영화와 텔레비전으로 자리를 옮기고 연극은 외도처럼 가끔 참여했지만 백성희는 연극인으로 그저 남아있었다. 그녀의 한눈 팔 줄 모르는 성향과 한 우물만 파는 집요한 성격이 그의 말처럼 연극의 인질이 되어 평생을 살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72년 47세 나이로 국립극단장에 뽑혀
배우들 공연 자유 위해 관료들과 맞서
그녀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1972년, 국립극단 사상 최초로 시행된 직선제에서 최연소 여성 단장(당시 47세)이 되었고, 가장 많은 무대에 오른 최초의 연극인이기도 하다.
백성희가 단장이 되기 전의 국립극단은 단원들이 제출하는 작품에 대한 간섭이 심해 단원들이 선택한 작품은 허락하지 않고 극단측에서 선택한 작품을 공연하도록 종용하곤 했다. 결과적으로 국립극단에 대한 신뢰는 하락하고 배우들의 사기는 저하되던 시절이었다. 백성희는 관료들의 나태한 행정, 전시행정에 맞서 배우들의 처지와 국립극단의 공연의 자유를 얻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는 한편, 당시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와 만나 후원을 다짐받았다. 육영수 여사의 서거로 원대한 계획들이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녀는 리더십과 행정력을 인정받아 1991년 다시 한번 단장에 추대되었다.
70, 80년대는 연극의 암흑기, 침체기였다. 정부가 작품 선택에 깊이 관여하여 작품의 질이 저하되고 창작극을 공모해도 각종 제재 때문에 변변한 작품들이 나오지를 않았다. 창작 활성화 시대를 열어보려고 노력하는 연극인들의 바람과는 달리 시대적으로 총체적 난국을 겪었다.
성공적 임무 수행으로 단장에 재임
연극중흥 위해 대대적 개혁안 제시
1991년 다시 단장으로 재임되어 두 가지의 목표를 세웠다.
첫째는 창작극의 활성화와 배우들의 처우 개선이었다. 연약하고 섬세한 그의 성품에서 어떻게 그런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었는지 깜짝 놀랄 정도로 그녀의 단장으로서의 행보는 선이 굵었다. 창작극의 발전을 위해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고 9명의 극작가(이현화, 이상현, 차범석, 김광림, 이만희, 이윤택, 윤대성, 노경식, 박조열)들을 선택하여 작품을 의뢰했고, 국립극단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계적인 연극 시스템을 구축했다.
즉, 극단 운영을 제대로 하기 위해 전속 연출가, 예술감독, 홍보 요원, 마케팅 전문가, 드라마 트루기(작품의 내용이 기본적인 극작술에 있어서 어떤 차이를 갖는지를 살피고, 작가나 연출가의 의도가 작품 속에서 잘 살아날 수 있도록 극작술적인 면에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드라마 트루기는 이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한 분야의 학문이며 연극, 영화, 뮤지컬, TV 드라마 등 극작술이 요구되는 모든 분야에서 필요로 한다) 등 다섯 작위를 생성해줄 것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이 절실한 것이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정식 단원의 수가 적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두번째는 2개의 극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본래 국립극장은 신협과 민극이 공존할 수 있도록 2개의 단체로 되어 있었는데 국립극단으로 통합되었다. 그러한 국립극단을 두 팀으로 나누어 지방 순회공연까지 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백성희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제안들은 당장에 실현되지 못했어도 세월을 두고 차곡차곡 이루어지고 있으니 앞을 내다보는 그의 안목이 얼마나 정확한지 느낄 수 있다.
상 훈
1962년 5월 문예상
1964년 한국연극상(현 백상예술대상)
1966년 동아연극상
1969년 3·1연극상
1970년 문공부장관상
1974년 문공장관 표창
1975년 한국명예위원회 공로상
1977년 3·1문화상
1979년 일본 공경 호에이주식회사 감사장
1980년 대통령 표창 / 서울시문화상
1983년 보관문화훈장 / 서울 모범시민 표창장
1984년 백상예술대상
1985년 대한민국 연극제 대통령상
1988년 동랑연극상
1990년 예술문화 공로상
1993년 한국연극인상
1994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96년 제6회 이해랑 연극상 특별상,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상, 96특별공로예술인
1997년 제6회 행원문화상, 제11회 춘강상(예술부문, 동덕여학단)
1998년 제34회 백상예술대상 여자연기상(연극부문)
1999년 한국연극배우협회 올해의 배우상, 한국에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대한민국 예술원상
2002년 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상
2004년 민족문화작가 협의회상
2005년 제29회 월남장(한국평생교육위원회)
2006년 제42회 동아연극상 특별상(동아일보)
백성희처럼 연극 무대에 많이 선 배우도 드물다. 그만큼 각종 상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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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국립극단장을 맡아 리더십을 한껏 발휘한 백성희는 한국 연극의 르네상스를 위해 정·관계 인사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