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이에 대한 평가가 사회 각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시각과 분야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민주화 20년을 맞아 여성의 삶은 민주화되었는가를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 사회의 개인 구성원들이 성별, 인종, 민족, 계층 등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설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은 구체적인 삶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공정한 보상과 평가, 공정한 시간의 향유를 통해 스스로의 권한을 강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민주화 20년을 맞은 현재, 여성들은 평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시민사회의 힘을 통해 정치체제의 민주화를 가능케 하였다. 시민운동은 제도변화와 제도개혁을 목표로 시민입법운동을 전개해 왔으며, 여성운동도 중립적으로 인식되는 민주주의가 사실은 여성을 배제하거나 차별적인 방식으로 통합시켜온 불완전한 것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다. 여성운동의 법제화운동은 정치·행정분야의 적극적 조치,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대한 입법화,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의 제정, 호주제 폐지 등 여성들의 권리를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는 민주화 20년과 여성운동 20년의 성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나, 이것만으로 여성의 삶이 민주화되었다고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다.

87년 이후 정치의 민주화는 시장의 자유화를 동반하였다. 97년 경제위기를 전후하여 기업조직, 노사관계, 분배구조가 신자유주의적 질서로 재편되고 있으며, 가족의 변화, 저출산 고령화, 다문화, 양극화 등 일상생활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 87년 이후 정치체제의 민주화를 통해 새롭게 분출되어온 다양한 사회적 요구들은 97년 이후의 변화 속에서 해소되는 대신 좌절되고 갈등하거나 집단간의 차이로 드러나고 있다. 정치의 민주화 과정에서 보편적이라 여겨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직접적인 차별을 중심으로 한 연대가 중시되었다면, 97년 이후의 경제체제 속에서 여성들간의 분화와 차이가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개인의 능력과 경쟁을 규범화하면서, 여성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차별을 야기하고 있다. 개인의 능력을 기조로 하는 노동유연화 정책이 고급 여성인력에게는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이 있으나, 공정한 경쟁의 조건이 허락되지 않는 대다수의 여성들에게는 성역할 고정관념과 관행을 수용하고 정당화하는 기제가 되고 있다. 과거에 비해 다소 증가하기는 하였으나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이제 막 50%를 넘었고, 일하는 여성 중에서 고용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임시·일용임금 노동자는 62%를 차지하고 있다.

성별 직종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이 주로 수행해왔던 업무들은 외주화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방과후 교실이나 보육시설 등의 교육보조 업무와 간병 서비스와 같은 사회서비스 분야의 일자리는 여성들이 가정에서 수행했다는 이유로 다시 여성들로 채워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자리들이 단기적으로 실업 해소의 효과를 줄 수 있으나, 고용 불안정과 저임금 문제를 안은 채 여성들이 수행하는 일에 대한 평가절하와 함께 성별 소득격차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데 문제가 있다.

87년 이후 정치체제의 민주화를 통해 얻은 입법화된 여성의 권리들이 여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없다면 무력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게 된다. 형식적이거나 선언적인 민주주의를 내세워 마지못해 여성을 끼워넣거나, 여성의 도덕성이나 모성적 가치에 호소하는 정치나 정책은 여성의 삶이 민주화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직면하는 차별이 민주화를 저해한다는 통찰력과 이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정당정치와 여성운동이야 말로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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