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추락하는 아버지 위상
다시 봄날에 다시 생각한다

친구랑 함께 밤길을 걷는 것은 종종 아버지를 따라 나서는 일보다 신나는 일이곤 했다. 까까머리 중학생에겐 아버지와 함께 수석을 주우러 강가를 헤매는 일이 그다지 흥이 나지 않았다. 모래자갈밭에 버너를 피워 끓여 먹던 송어 매운탕의 비릿한 얼큰함은 내 입맛을 애어른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힘들게 주워 가지고 온 돌을 그라인더로 갈아 햇살 번지듯 피어오르는 무늬를 찾아내는 일은 오후 내내 따가운 햇볕의 힘든 여정을 충분히 보상해주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 그것은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한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은 어린애지만 아버지보다 용기를 가지고 인생에 대처하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은….

아버지는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서울시청 건설국에서 건축기사로 근무하셨다. 건축은 그의 적성에 잘 맞았고, 동대문 서울운동장 등 굵직한 공사를 열정적으로 이끌었다. 극도로 실용적이면서도 미적 감각을 추구하는 역설적인 건축이야말로 자신을 담아낼 적당한 그릇이었다.

‘가련한 시대의 인간들의 온갖 감상과 애증, 다정함과 사악함을 차라리 변하지 않는 구조물로 쏟아내자. 건물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혀라. 이를 막는 온갖 방해물을 제거하라.’ 그는 분투하였다.

때로 작업실의 설계도면 속에서 그는 깊은 어둠의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 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이를 빠져나왔다. 머릿속에 있는 웅장한 건물들은 그가 가진 풍부하고 따뜻한 마음을 기하학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음 속의 마천루는 이미 거대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종종 그는 고독감을 느끼곤 하였다. 고독의 실체는 어쩌면 지나친 재능이었으리라. 세상에 나타나는 어떤 존재로도 채워지지 않는 부족한 것이 있다는 느낌과 그 속에서 유영하는 한없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자신의 명확한 대조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큰 혼란 속에 있었다. 건축과 음악의 선택이라는 실존적인 결단 앞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한양대학교 재학 중 아르바이트로 음악을 시작한 것은 그의 삶의 궤적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이 되었다. 현장에서 만나는 철근, 콘크리트, 벽돌들은 그의 에너지와 정열을 뿜어내는 차라리 따뜻한 음표들이었으리라. 그는 극적으로 타협하였다. 마침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기로 한 것이다.

시청 근무를 그만 둔 1961년 2월 이른 봄의 날씨는 미래에 대한 어정쩡한 불안으로 더욱 스산하게 느껴졌지만, 내면에서 솟구치는 충만한 기대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책상 앞에 놓여진 청사 돌계단을 내려오는 아버지의 낡은 흑백사진 한장은 그날의 결기를 전한다.

그것은 자신이 사용해본 적조차 없는 내면의 힘에 자신의 삶을 맡기기로 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 얼굴에는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흥분조차 엿보이지 않는다. 흥분이란 불균형의 다른 표현이므로…. 비참한 고립감을 떨쳐내고, 미래에 대한 불안조차 자신감으로 덮어버린 모습은 결연함을 넘어 평화롭기까지 하다.

고향 진주의 먼 해안선과 능선의 굴곡, 황톳빛 논밭의 굵고 가는 경계들의 자취가 만든 그의 감성은 ‘안개’, ‘무인도’라는 음악을 낳았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 속의 아버지가 ‘꽃밭에서’ 마스터 릴테이프를 돌리며 응시하는 내게 다가선다. 나는 문득 상념에서 깼다.

세상에는 많은 아버지가 있다. 온 세상 초록의 나뭇잎들이 반짝이며 내리는 햇볕들과 어울려 마치 갓 태어난 생명을 축복하듯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계절 5월은 아버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우리 시대 이버지의 초상은 점점 더 염려스럽고 불안한 모습이다.

‘남은 아버지 혼자서 술잔이나 기울이신다’며 위로하던 마종기 시인의 아버지도, ‘알에서 깨어나 새끼가 되면 아버지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버린 후 돌 틈에 머리를 박고 쓸쓸히 죽어가는 가시고기’의 작가 조창인의 아버지도, 췌장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세상 모든 아버지가 스스로 죄인인 까닭에 굽은 등, 처진 어깨를 가족들에게 기댈 수 없었던’ 김정현 선생의 아버지도, 자식의 일로 차가운 방에 수감된 어느 아버지도 그저 슬프고 초라할 따름이며, 그다지 웃을 기색은 아니다.

예전 내 아버지도 그랬었고, 지금의 나도 그렇다. 그저 바람이 있다면 세상일에서 조금 돌아서 가는 일이 있더라도 필요하다면 아이들에게 책 한권 더 사주고, 그리하여 먼 훗날이라도 세대를 가로막는 어두운 간격 위에 서로의 마음의 강물을 잇는 작은 구름다리라도 하나 놓였으면 하는 것이다. 이제야 책상 위의 아버지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게 된 지금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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