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거품 꺼진 자리에서 새 길을 찾다

지난 주말 일본 도쿄의 시부야에 있는 작은 극장 ‘이미지 포럼’에서 ‘한국 아트필름 쇼케이스’라는 상영회가 시작됐다. <망종> <가능한 변화들> <용서받지 못한 자> <극장전>, 이 4편의 영화가 차례차례 이곳에서 개봉될 것이다.

이미지 포럼은 우리의 하이퍼텍 나다나 시네큐브, 서울아트시네마 같은 예술영화 전용관이다. 극장장 토미야마 가츠에씨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제작부를 거쳤다. <감각의 제국>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 극장에서는 벌써 세해 동안 한국독립영화 특별전이 열렸기 때문에 토미야마씨는 한국의 ‘웬만한’ 인디 감독들에게도 큰누이처럼 친숙해졌다.

영화진흥위원회는 당초 아트필름 쇼케이스 행사를 지난해 시작하려 했다. 이미지 포럼과 협력약정을 맺고 작품을 선정하다보니 어느덧 여름, 영화를 개봉하려면 홍보기간을 한국보다 훨씬 길게 잡는 일본의 특성상 행사를 강행하기는 어렵다고 토미야마씨 쪽에서 말했다.

로마에 가서는 로마법을 따르랬지. 2006년으로 잡혀 있던 상영회를 그래서 올 1월 말로 연기했다.

이 행사는 원래 영화진흥위원회 김혜준 사무국장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아이디어가 반짝 떠올랐을 때는 일본의 ‘한류’ 붐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한류스타’의 명망에 기댄 프로젝트 영화들이 모두 비싼 값에 일본으로 팔렸고, 그 영화들이 앞다퉈 개봉됐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같이 흥행에 성공한 영화도 있고, 수지와는 별개로 배용준씨 팬들의 충성도를 확인시켜준 <외출>이 있었지만, 일본의 한국영화 수입사들은 대부분 고배를 마셨다. <괴물>과 <왕의 남자>까지도 흥행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한류는 이제 끝난 것 아닌가?”

아트필름 쇼케이스 홍보를 위해 <망종>의 장율 감독과 이미지 포럼을 찾았을 때 몇몇 기자들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사실 그들은 마음에 답을 이미 담고 있는 듯했다. 그 답에 실은 나도 일정부분 공명하고 있었다. 해외시장, 특히 일본시장을 의식한 프로젝트 영화들이 대부분 우리 관객들의 호의를 사는 데 실패하지 않았던가. <괴물>과 <왕의 남자>의 실패는 ‘한류스타’ 현상이 제공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두 나라 관객이 굉장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환상. 두 나라 사이에는 역사적·사회적 이해를 증진해야 한다는 숙제가 놓여 있음을, 영화를 수용하는 문화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양국의 영화관계자들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의견을 내놓는 이들도 있다. <웰 컴 투 동막골>을 일본 의원들과 함께 관람했다는 테라와키 켄 전 문부과학성 조정관이 그 중 한 사람이다. 이 정치적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남북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작품 자체도 뛰어나다고 평했다는 것이다. 물결이 스치고 나면 흔적이 남는 법. 지식사회에, 진지한 영화관객들에게 훌륭한 한국영화가 남긴 인상은 지울 수 없으리라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아, 그 자신이 영화평론가이다). <괴물> 역시 평단의 지지를 얻어냈다.

어쨌든 백화만발의 때는 일단 지났다. 그러다보니 상업적 후광이 없는 한국의 예술영화, 독립영화들을 소개함으로써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보여주자고 시작한 아트필름 쇼케이스는 이제 영화 자체의 진정성으로 새로운 대화 상대자를 찾는 개척사업, 새로운 시작이 되고 말았다. 거품이 꺼지고 난 뒤 드러나는 바닥에서 우리는 길을 발견하거나, 혹은 길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작업이다. 산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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