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여인’
말했다시피 ‘해변의 여인’은 두 남자와 두 여자 사이의 연애와 한 남자를 둘러싼 닮은 두 여자에 대한 고찰이다. 영화감독 중래(김승우)는 새로운 시나리오를 작성하기 위해 미술감독에게 무조건 여행을 떠나자고 조른다. 미술감독 창욱(김태우)은 애인을 동반하겠다는 조건으로 중래의 부탁에 수긍한다. 두 남자와 한 남자의 애인으로 시작된 여행은 애초부터 가능한 6가지의 경우의 수 내부에서 좌충우돌 오간다.
‘생활의 발견’에서와 마찬가지로 중래는 한 여자의 두 가지 판본 사이에서 갈등한다. ‘생활의 발견’이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와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의 동일성과 모순을 그려냈다면 ‘해변의 여인’은 어제까지 사랑했던 여자가 내일 싫어질 수밖에 없는 묘한 심리적 모순을 조명한다.
어젯밤 그토록 원했던 그 여자, 문숙(고현정)은 생각을 ‘클리어’하게 정리해야만 할 대상으로 강등되고 만다. 그리고 그는 그녀 문숙이 자신이 원했던 바로 그 여자가 아님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자 한다. 납득의 논리는 비현실적이며 억측일 뿐이다. 문숙의 과거, 현재, 미래가 총동원돼 어제 그 완벽했던 여신은 탈신성화되고 세속화된다. 흥미로운 것은 중래가 그녀와 닮았지만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매료된다는 사실이다. 내 품안에 안기는 순간 후광을 잃고 매력을 잃어버리는 그녀, 어쩌면 그것은 모든 사랑의 속내이자 비밀일 수도 있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장면은 욕망의 아수라장 같은 이틀을 정리하는 쪽이 중래가 아닌 문숙이라는 사실이다. ‘생활의 발견’의 남자가 두 여자 사이의 방황을 회전문 고사를 떠올리며 끝낸다면, 문숙은 집착으로 점철되었던 이틀 밤을 스스로 종결한다. 수형도와 도식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개념화하고 선입견을 강화하고자 하는 중래와 달리 문숙은 감정의 끝까지 가 봄으로써 성큼 헤어 나올 용기를 얻는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모래밭에 문숙의 자동차 바퀴가 파묻혔다 빠져 나오는 장면은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될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