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색한 시골 살림에 변변한 비옷이 따로 있을 리 없었고 찢어진 종이우산은 언제나 쓰나마나였다. 게다가 작은 바람에도 뒤집어지기 일쑤이니 들고 다니기 차라리 짐스러웠다. 또 검정고무신은 왜 그리도 잘 벗겨지던지. 장마철에는 학교 오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었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잠에서 깨어나면 부엌에서는 고소한 부침개 냄새가 날아왔다.
서울로 이사 와서 죽 살았던 곳은 한강변이었다. 마누라는 없어도 살지만 장화 없으면 못 산다는 상습 침수 동네였다. 다행히 우리는 산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 피해를 겪지는 않았지만 학교 다니는 길은 늘 시커먼 흙탕물이었다. 아이들에게도 장화는 필수품이었다.
큰비가 오면 우리는 신이 나서 한강변으로 달려갔다. 시뻘건 강물에 소나 돼지가 떠내려 왔다. 때로는 집이 통째로 떠내려 오기도 했다.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던 그 시절 큰비 구경은 그럴 수 없이 스펙터클했다.
철이 들면서부터는 장마가 시작되면 혹시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잠을 설쳤다. 아래 위 양쪽으로 축대가 허술한 데다 집도 너무 낡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간혹 축대 한쪽이 무너지고 천장이 내려앉은 적이 있긴 했지만 부모님이 아파트로 이사갈 때까지 집은 아슬아슬하게 버텨냈다.
나는 결혼 이후 죽 아파트 생활을 해온 덕분에 비가 많이 와도 별 걱정을 않고 살았다. 그런데 방심은 금물이라고 20여 년 전 내가 살던 아파트 지하에 물이 꽉 들어차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1층에서 살았기 때문에 걱정을 꽤 했는데 옆 동네 아파트와는 달리 우리는 그걸로 그쳤다. 그래도 우리도 수재민이라고 구청에서 담요 한 장씩을 나눠 주었다. 색깔이 멋있었다.
몇 년 전부터는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조금 높은 층으로 옮긴 덕분이다. 그런데도 나는 갈수록 장마철이 싫어진다. 덜 마른 빨래에서 쉰 냄새가 나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누가 나를 퍼붓는 빗속을 뚫고 나가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아니다. 아파트는 문만 꼭 닫고 있으면 눅눅하지도 않다.
장마철이 점점 싫어지는 까닭은 큰비만 오면 죽거나 다치거나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다. 그것도 착하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만 골라서. 워낙 불공평한 게 세상살이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천재지변은 어쩔 수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옛날이면 몰라도 지금과 같은 시대에 진짜 천재라고 부를만한 재앙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마디로 치산치수를 잘못해서 강물이 범람하고 산이 무너지는 걸 천재라고 한다면 도대체 정부는 왜 있으며 세금은 어디다 쓰려고 걷어가는 걸까.
큰비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시골 사람들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다. 자식들 다 떠나보내고 혼자 고향을 지키는 노인들이 많다고 한다. 누가 그들로 하여금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생을 마감할 수 없게 만들었는가.
보송보송한 아파트에 앉아 TV가 전해 주는 참혹한 수해 현장을 ‘구경’하면서 나는 공연히 죄스러워진다. 큰비가 오는 것까지야 막을 수 없겠지만 죽는 사람만은 생기지 않았으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