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메가와티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Megawati Sukarnoputri)는 1947년 1월 23일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66년 수카르노가 수하르토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나기 전까지 대통령관저에서 곱게 자랐다.

메가와티의 정치적 경력은 83년 당시 인도네시아의 합법적인 야당인 인도네시아 민주당(PDI)에 입당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87년 하원의원이 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전업주부로 생활했다.

87년 선거전에서 메가와티의 공헌을 인정한 민주당은 메가와티에게 의원직을 주었고, 메가와티는 93년까지 의원직과 93∼98년 PDI의 당의장직을 수행한다. 수하르토 정권과 군부는 PDI 내의 어용 세력을 동원하여 메가와티를 PDI 당의장직에서 축출하고자 메가와티의 사무실을 습격하는 난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메가와티는 ‘탄압 받는 야당 지도자’의 이미지를 굳히면서 반 독재와 저항 및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5년 뒤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메가와티는 자카르타에서의 반 독재 대규모 소요로 97년 의회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는데, 이는 그녀의 대중적 인기를 더욱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97년 아시아 경제 위기와 부정부패에 대한 대중의 높아지는 분노로 마침내 98년 30여 년 동안 독재를 휘둘렀던 수하르토 정권은 붕괴되었다. 수하르토의 몰락은 메가와티의 인기를 더욱 높였다. 99년 초 메가와티가 이끄는 인도네시아 투쟁민주당(PDI-P)은 44년 만에 치러진 국회의원 자유선거에서 유권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득표를 하면서 제1당이 되었다.

99년 10월 대통령 간접선거에서 메가와티는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대통령을 꺼리는 이슬람 정서에 밀려 와히드(A Wahid)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고 부통령이 되었다.

2001년 7월 와히드가 부정부패와 실정으로 탄핵되자 메가와티는 와히드의 잔여 기간인 2004년 10월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이 메가와티에게 걸었던 기대와 희망은 커다란 실망과 불만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대통령 재임 기간 군부는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고, 국가 발전에 필요한 정치적·경제적 개혁을 실행하지 못했다. 국가예산의 반 정도가 국가채무 이행에 들어갔으며, 생필품과 휘발유 등의 물가 상승, 4000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 외국인 투자 기피, 부정부패 만연, 빈곤 심화 등 국가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 결과 2004년 10월에 실시된 최초의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메가와티는 유도요노(B Yudhoyono)에게 패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메가와티는 대립이나 투쟁을 싫어하는 원만한 성격으로 포용력이 크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수하르토에 대한 투쟁에서도 불법적이거나 폭력적인 수단을 거부하고 오직 합법적 수단만을 사용했으며 오히려 이것이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경험 부족, 정치력 부재, 지적 능력의 취약, 통합사고력의 결핍, 모호한 비전 제시 등 정치가로서 치명적인 악평을 수없이 받았다.

메가와티의 리더십은 달빛형 리더십이다. 달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오직 태양빛을 반사해서 빛날 수 있는 것처럼, 그녀는 아버지의 후광과 업적, 기억에 감성적으로 의존함으로써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출발했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능력과 자질을 입증하고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되는 여성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메가와티는 그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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