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베트남전부터 걸프전에 이르기까지 주요 전쟁터의 현장을 누빈 세계 최초의 여성 종군기자. ‘팔라치가 인터뷰하지 않은 인물은 세계적인 권력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각국의 정치적 거물과 만난 인터뷰어.
20세기 가장 유명한 여성 저널리스트인 오리아나 팔라치(74)의 전기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아테네)가 출간됐다. 정치·사회적 거물들의 노골적인 모습들을 폭로하면서 그 자신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보호해 왔던 팔라치의 삶을, 저자는 오랜 시간에 걸친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했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1930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피렌체에서의 어린 시절은 팔라치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독재정권 하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아버지를 도왔던 경험들은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했다. 또한 엄청난 독서광이었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많은 책을 읽으며 일찍부터 작가가 되기를 꿈꿨다. 글을 쓰며 돈을 벌어야 했던 그는 1946년 16세 때부터 기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팔라치는 처음 일을 시작할 무렵부터 신문기사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학적인 저널리스트로 유명했다. 실제의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지만 전통적인 보도기사와 달리 그의 기사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했고 자신의 사상과 신념이 담겨 있었다.
67년 베트남전에 자원한 이후 중동전쟁, 헝가리 침공, 멕시코 대학살과 걸프전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주요 전쟁터의 현장에는 팔라치가 있었다. 68년 멕시코 정부의 학생시위 진압 과정에선 어깨와 다리에 총상을 입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오리아나 팔라치가 가장 돋보인 것은 정치적 거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그는 덩샤오핑, 헨리 키신저, 아야툴라 호메이니, 야세르 아라파트, 인디라 간디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각국의 거물들을 만났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으로 정면 공격을 퍼부으며 언쟁을 벌이는 그의 인터뷰 기사들은 인쇄매체의 한계를 깨뜨렸다. 각국의 정치적 지도자들에 맞서 한치의 굽힘이 없이 당당한 그의 모습은 대중의 큰 인기를 끌었다. 이란 혁명의 지도자 호메이니를 만난 자리에서 쓰고 있던 차도르를 벗어 그의 발 앞에 던져버린 일화는 유명하다.
팔라치는 그만의 여성주의를 글 속에서 표현했다. 아시아 일주 여행 중에 자신이 만났던 파키스탄, 인도, 말레이시아, 중국 등 아시아 여성들을 이야기하며 가부장제를 공격했다. 파키스탄에선 남편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않고 결혼하게 된 열네 살짜리 여성과의 인터뷰 기사를 썼고 힌두 국가들에서 여성의 지위, 인도 독립투쟁에서의 여성들의 정치적 역할 등 민감한 문제들을 기사에 담았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유명한 기자였지만 팔라치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바쁜 일정에서도 62년 첫 소설 ‘전쟁터의 페넬로페’ 이후 ‘역사와의 인터뷰’ ‘무 그리고 아멘’ ‘태아에게 보내는 편지’(동천사, 92)를 발표했다. 또한 그의 유일한 연인이었던 그리스의 반체제 시인인 알렉산더 파나골리스와의 사랑을 담은 ‘한 남자’로 비아레지오상을, ‘인샬라’(대흥, 93)로 헤밍웨이상을 수상했다. 9·11 테러를 목격한 후에는 이슬람권의 세계정복 야심과 종교전쟁을 비판한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명상, 2005)을 출간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지지 않았던 그를 굴복시킨 것은 바로 ‘암’이었다. 부모와 여동생을 암으로 잃은 그는 암에 걸리자 원고 마감 시한을 맞추기 위해 병원에 가지 않은 채 6개월을 허비한 후에야 수술을 받기도 했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며 암 투병중인 팔라치는 2004년 발간한 저서 ‘이성의 힘’에서 이슬람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무슬림 연맹에 의해 재판에 회부된 상태이다.

산토 아리코 지음/ 김승욱 옮김/ 아테네/ 3만 원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