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딸애는 15개월 되던 때부터 놀이방에 맡겨졌다. 그 당시 같은 동네에 살던 절친한 내 친구도 자신의 아이를 같은 놀이방에 맡겼는데 나로선 그 사실이 그렇게 큰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한 놀이방에서 지내면서 우리 딸애가 친구의 아이를 할퀴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에 한 번씩 얼굴과 등에 할퀸 자국이 생기는 사태가 늘어나면서 나도 민망했지만 무엇보다 친구가 많이 속상해했던 것 같다. 드디어 나에게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너무 속상하다”부터 시작해서 “우리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어쩜 아무 대책이 없느냐”는 부모 책임론까지 거론되더니 급기야 나로선 듣고 싶지 않은 말까지 친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라면 아이를 그렇게 강퍅하게 키우진 않는다. 꽃도 보게 하고 하늘도 보게 하고…”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에 아무 대꾸도 못 하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급기야 내 분노가 폭발했다. 그날 심하게 아이를 때렸고, 술도 못 마시는 내가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쓰러져버렸다. 그 뒤부터 친구 아이를 할퀴는 날엔 버릇을 잡겠다는 명목으로 딸애를 때리는 일이 한동안 계속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나 나나 많이 미숙했다. 아이가 그 놀이방에서 유난히 공격적이 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무조건 매로 아이를 다잡으려고 한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누구도 아닌 절친한 나의 친구가 내 아이를 강퍅하다고 평가한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 속상하고 화난 감정을 모두 어린 딸에게 풀어버린 셈이다.
아이의 모든 문제가 다 자기 책임인 양 전전긍긍하는 엄마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히스테리에 시달리게 된다. 아이와의 사이에 인격적 경계선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종종 자학하는 심정으로 아이를 학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몸을 빌려 태어난 것만 빼면 아이는 별개의 인격체이다. 아이는 내 의도와 상관없는 외모와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나와 다른 감정을 가지고, 전혀 다른 체험을 하며 사회에 나가서도 나와는 다른 몫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공동체로 돌아갈 아이를 성인이 될 때까지 잠시 맡아 키우는 임시 엄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좀 더 일찍 했더라면 그 과도한 책임감 때문에 아이를 함부로 때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아직도 나는 아이 문제에 마냥 대범하지는 못하다. 사회는, 육아의 모든 것이 엄마 책임이라며 시시각각 숨통을 조여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일 숨을 고른다. 세상의 협박이 아무리 치명적이라도, 그래도 아이는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되뇌면서….

abortion pill abortion pill abortion pill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