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대중에겐 익숙해질 수 없는 현대미술의 경직성을 감안할 때, 마니아층까지 몰고 다니는 극소수 미술인에게는 색다른 무언가가 있음이 틀림없다.
지난 세기 현대미술은 티셔츠, 가방, 머그잔 같은 팬시 상품 위에 미술품의 이미지를 인쇄해 팔았다. 그것이 현대미술과는 평생 무관하게 살아가는 대중 일반과 소통하는 그리고, 미술이 생존을 도모하는 자본주의적 해법이었다.
하지만 티셔츠 위에 마릴린 먼로와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친숙한 스타나 만화를 재현한 현대미술품의 복제를 보고 그것의 원화가 ‘미술품’임을 알 소비자가 얼마나 될까? 극히 일부만이 ‘앤디워홀’이니, ‘리히텐슈타인’같은 60년대 팝아트 대부의 이름과 티셔츠 그림의 원작자를 연결시킬 수 있는 안목을 갖췄을 것이다. 어쨌든 대중적 기호를 예술품으로 담아낸 시도가 당시에는 파격이었겠으나, 90년대 성사된 동일한 실험은 미학적으로는 이미 한물 간 것이다. 하지만 높은 대중 선호도는 무수한 현대 미술품의 제작 동기가 되어준다.
본디 소비자는  친숙한 것에 눈길을 주는 법이어서, 난해하기로 정평 난 현대미술 속에서 마주친 ‘친절하기 이를 데 없는’ 만화 같은 미술품은 관객과 전시장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 일조했다. 바로 이런 취지에서 재등장한 것이 ‘네오 팝’이다.
저팬 팝으로 국제적 지명도를 얻은 나라 요시토모가 굴지의 대기업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지난달 국내 첫 개인전을 열었다. 눈 꼬리가 앙증맞게 쭉 찢어진 영악한 이등신 꼬마아이가 나라의 트레이드마크다. 전시 공간보다는 미니 홈피 사진첩에서 수차례 스크랩된 이 일본 작가의 그림파일을 구경한 경험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라의 작품 이미지는 국내 첫 개인전 개최에 앞서, 모니터 안에서 무상으로 국내 인터넷 유저들과 친숙한 조우를 한 바 있다.
그들이 만난 나라의 여자 아이 삽화 연작은 충분히 ‘팬시 상품’적이어서, 그것이 미술작품이라는 건 첨부된 글을 통해서나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나라의 오프닝쇼에는 대부분 나이 지긋한 하객들이 초대되었는데, 그들은 큐레이터의 해설에 따라 그림을 감상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찬사를 남발했다. 하긴 최상급 갤러리에서 최상급 작가를 모셔다가, 최상급 하객들만 초대한 자리에 자신들이 끼었으니 어찌 상찬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런 의문을 가져본다. 소녀 취향 만화 일색인 그림들이, 고상한 미술관에 내걸려 ‘특정 소수’의 나이든 관객에 의해 관람되는 것과, 규격화된 모니터를 통해 규격화된 미니 홈피 사진첩에 올려져 ‘불특정 다수’의 젊은 유저에 의해 관람되는 것 중 어느 쪽이 작품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한 것일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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