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의선사·혜장·추사… 때론 사제로 때론 지란지교로

삼국시대에 차 씨앗이 전해진 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 피웠던 한반도의 차 문화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조선시대에 쇠퇴 일로를 걸었다. 끊어질 듯 가늘게 명맥을 이어가던 다도(茶道)는 조선말 차의 참 맛과 풍류의 정신세계를 구가하던 일단의 유생과 사교적 승려에 의해 부흥의 기틀을 마련한다. 대표적 인물이 정약용, 초의선사, 혜장스님, 추사 김정희 등이다.
정약용(1762∼1836)은 차의 깊은 맛을 체득한 뒤 아예 호를 다산(茶山)으로 짓고 차인임을 자처했다. ‘차를 사랑하는 백성은 흥하고, 술을 마시는 백성은 망한다(飮茶興 飮酒亡)’는 유명한 경구도 그가 남긴 말이다. 다산이 차를 접하게 된 것은 호남의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1805년께 인근 백련사 주지 혜장스님을 만나면서다. 당시 44세, 혜장은 그보다 열 살 아래였지만 유배생활의 말벗으로는 그만이었다. 둘은 사제처럼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주고받았고, 혜장은 해남 대찰 대흥사의 강사스님으로 이름을 날렸다. 다산이 초의선사(草衣, 1786∼1866)를 만난 것은 혜장을 만나고 4년 뒤였다. 다산은 뒷날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게 될 초의를 평하길 “남루한 옷, 민둥 머리에 중의 껍데기를 벗기니 유생의 뼈가 드러난다”고 했다. 24세 젊은 초의가 두 배 연상의 당대 거유(巨儒)를 만났으니 정신적·학문적 영향이 컸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국 차의 성서라 할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의 탄생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둘의 만남은 다시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만나는 인연으로 이어지고 초의는 한동안 한양에서 머물면서 정·관계, 재야 인사들과 두루 교분을 맺어 문화의 중심 인물이 됐다. 동갑내기였던 추사와의 교우는 첫 만남 이후 42년 동안 이어졌다. 둘은 시를 주고받고 그림을 나눴으며, 차와 글을 선물했다. 그들이 나눈 세월만큼 동다송과 다신전의 깊이도 더해갔다.

칼럼니스트 변성석 씨는

경북대 정책정보대학원 언론홍보과 졸업 후, 영남일보 편집국 취재기자·기획실 부장을 거쳐, 한국언론재단 중·고교 미디어교육 강사, 대학 강사로 활동 중이다. 기자 시절 생생한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한 한국 전통 차에 대한 기사를 7개월여 진행해 큰 인기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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