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의 허스토리] 우라늄의 핵분열 발견한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아인슈타인이 ‘우리들의 마리 퀴리’라고 부르며 재능을 인정했던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

1944년 오토 한(Otto Hahn, 1879∼1968)이 핵분열 발견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을 때 그의 동료로서 오랫동안 연구를 함께했던 리제 마이트너는 공동 수상의 영예를 안지 못했다. 유대인이던 그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해 있는 동안 한의 핵분열 발견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마이트너는 한의 편지를 받고 그것이 우라늄이라는 불안정한 원자핵이 작은 충돌로도 쪼개질 수 있다는 핵분열 원리를 설명했고 또 그 때 방출되는 에너지까지 계산했다. 이 실험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공동 작업으로 연구하던 과제의 일환이었으며, 한은 그 결과를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마이트너에게 의견을 묻고 나서야 답을 알 수 있었음을 참작할 때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 1920∼58)의 경우처럼 유대인과 여성이라는 핸디캡이 그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1878년 오스트리아의 변호사 부친에게 태어난 본명 엘리제는 교양있고 자유로우며 진보적이던 아버지 덕에 과학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1901년 23세가 된 그는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빈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 공부를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의 대학은 러시아와 미국보다 30년 늦은 1899년 여성의 입학을 허용했던 것이다. 1905년 말 그는 ‘이물질 간의 열전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빈대학의 네 번째 여상 박사의 탄생이었다.

1907년 29세의 마이트너는 베를린의 막스플랑크연구소로 간다. 그러나 연구소장이 여성 연구자 채용을 반대했기에 정당한 지위는커녕 지하 연구실 외의 다른 방 출입조차 금지되어 화장실도 식당 화장실을 사용했다. 그 곳에서 4년 동안 무보수로 일한 후에 유급 자리를 얻은 그는 1918년 오토 한의 화학방사능부와 나란히 자신의 물리방사능부를 창립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그나마 자격을 상실하여 스웨덴으로 피신을 했다. 30년간 한과의 대단한 파트너십이 외부 여건으로 인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마이트너가 노벨상을 받을 뻔했던 적은 이전에도 있었다. 1924년, 1925년 그리고 1936년에 그는 프로토악티늄에 관한 논문으로 노벨화학상 후보로 추천된 적이 있었다. 물론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1949년 막스 플랑크메달 금상, 66년 엔리코 페르미상 등을 공동 수상했지만 오토 한의 공동 연구자라는 그림자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2차대전 후 그의 명성이 올라갈 때 ‘원자폭탄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지기도 했지만 그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노력하고 싸웠으며 미국에서 원자폭탄을 함께 개발하자는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58년 제2의 고향 스웨덴에서의 22년간의 삶을 뒤로하고 78세의 마이트너는 영국 케임브리지의 조카 오토 후리슈 곁에서 10년 정도의 여생을 보냈다. 94년 원소번호 109번 마이트네륨은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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