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잠깐의 실수였다. 그 강의를 수락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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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결혼에 대한 강좌를 개설했는데 맨 첫 시간을 맡아 달라는 거였다. 한마디로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경험자로서 안내를 해줬으면 좋겠단다. 처음엔 사양했다. 전 결혼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요. 그랬더니 상대편 말이, 선생님처럼 결혼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계시나요였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이 내 결혼생활을 어떻게 알겠어, 그야말로 작전상 립서비스를 한 거였는데 그 당장엔 정말 그런가? 나도 모르게 귀가 솔깃했다(나이가 들어가면 얼굴은 두꺼워지고 귀는 얇아지나 보다).

게다가 평소 우리 사회의 이혼율이 높아가는 이유는 젊은이들이 결혼에 대해 아무 준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을 위한 결혼준비 프로그램이 시급하다고 주장해 왔던 터라 일종의 얄팍한 사명감이 발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올 가을엔 나의 당면문제라고 할 실버 파트너십에 관한 책을 써야지 하고 궁리 중이었는데, 이번 강의가 그 첫 단추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나름의 계산속도 작용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나. 식은 죽 먹기일 것 같던 강의가 은근히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더니 하루하루 갈수록 그 도가 더 심해가는 게 아닌가. 결혼생활을 오래 겪은 선배로서의 현명한 가이드는커녕 도대체 나 스스로도 결혼이 뭔지 확실한 답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또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라고 결혼에 대해 무슨 준비가 있었냐 말이다. 그냥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한 거였지. 결혼 안 하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걸 그 땐 왜 생각도 못 했나 몰라.

아무튼 이왕 이렇게 된 거 순전히 결혼경력 35년이라는 숫자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겠네 싶으면서도 켕기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나처럼 살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나처럼 살지 말라고 하기에도 낯간지러울 것 같기만 하다.

그저 물불 모르고 저질러서 이 정도로 살았으니 괜찮은 셈이지 싶다가도 조금만 준비했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게 나의 결혼생활이기 때문이다(남편의 결혼생활은 잘 모르겠다).

이런 와중에 마침 오래된 친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머리에 번쩍! 하는 게 있었다. 결혼 초에 이미 불화가 심각했던 그 친구는 당장 이혼하라는 나의 조언을 묵살하고 30년 넘어 결혼생활을 유지해온, 나에게는 아주 불가사의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결혼이 뭐냐는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나간 자리에서 친구는 얼마 후 딸을 결혼시키고 나면 이혼하겠노라는 뜻밖의 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아니, 왜 새삼스레? 남편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자신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결혼시키고도 살아갈 인생이 긴데 이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숨죽이고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작년에 처음으로 전체 이혼 건수는 줄어들었는데 황혼이혼만은 늘었다는 발표가 있었지?).

친구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남편과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는 사유들을 열거했다. 너무 심각해서 오히려 말하나마나한 사유는 제쳐두고 지극히 사소한 것들을. 그런데 그 중에 많은 것들이 내게도 똑같이 들어맞았다. 예를 들면, 남편에게 밥 차려 주는 일이 그렇게 귀찮을 수 없다고 했다(밥 차려 줄 남편이 있는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기라는 충고는 정중히 사양합니다).

어, 그거 내 얘기잖아! 그런데,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친구는 귀찮다는 생각을 속으로만 하는데 나는 그걸 겉으로 드러낸다는 거였다. 왜 항상 내가 밥을 차려야 하느냐, 나도 당신 손으로 차린 밥 좀 먹어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구시렁거리면서. 친구는 겉으로 드러내면 시끄러워지는 게 싫다고 했고 나는 시끄러워질망정 내 속마음을 상대가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게 뒤늦게 이혼을 결심한 친구와 그냥 이대로 계속 살기로 결심한 나의 차이였다.

그렇다면 결혼은 결국 소통의 문제인가.

이게 정답일까.

(독자 제위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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