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무척 좁았던 식탁이 시간과 더불어 점점 넓어져 간다…이제 달랑 부부 둘이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다. 빈 의자들을 보면 쓸쓸하냐고? 글쎄. 빈 의자는 내 마음속에선 비어 있지 않다. 의자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앉아 있다.

다시, 봄이다. 봄이면 공연히 싱숭생숭해지던 것도 이젠 옛날 얘기다. 그런데도 봄이 오면 달라지는 게 하나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집안 구석구석이 갑자기 너무 지저분하게 보이는 거다. 안 보이던 먼지도 갑자기 보이기 시작하고 쌓아 놓은 책들도 갑자기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하면 몇 안 되는 가구도 갑자기 너무 낡아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아마도 잠재되어 있던 주부본능이 따뜻한 햇살과 더불어 꿈틀거리는가 보다.

정리하기보다는 버리는 게 쉽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이번엔 뭘 버릴까 집안을 두리번거려 본다. 역시 책과 옷과 플라스틱 그릇들. 딱 이 집에 이사 온 시간 만큼 늘어난 짐들이다. 아니 그런 것들보다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가구들이 없나 둘러보니 이사 올 때 엄청 버렸기 때문인지 버릴 만한 것들이 눈에 안 띈다. 오히려 30여년의 결혼생활 동안 쭉 지녀온 가구들이 이렇게 없구나 싶은 게 참으로 얄팍하게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 같은 것이 느껴질 정도이다.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건 남편이 중학교 때부터 써온 책상, 그 다음이 식탁이다. 그러니까 책상의 역사는 반백 년쯤 되었고 식탁은 28년쯤 됐나.

와, 이 변화무쌍한 시대에 28년씩이나. 정작 30에 가까운 숫자가 매겨지니 새삼스레 이 조그만 식탁이 대단하게 보인다. 그렇다면 이 식탁은 그냥 식탁이 아니라 나의 가족사를 증언하는 역사적 기념물이 아닌가.

혼수로 마련했던 작은 자개 밥상을 버린 건 결혼한 지 6년인가 지나서였다. 좁은 밥상에서 여덟 식구가 전쟁처럼 밥을 먹던 어린 시절의 한을 갚고 싶었던 때문인지 난 다른 것에 비해 유난히 공간에 대한 욕심이 컸었다. 당시 나는 굉장한 무리를 해서 비교적 시설이 좋고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가구 중에서 제일 먼저 6인용 식탁을 사 주방 겸 식당에 들여놓았다. 나는 드디어 내 생애 처음으로 우아하게 식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노라는 뿌듯한 자부심에 한껏 취했었다.

하지만 웬걸, 야심만만하게 마련한 식탁은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70년대의 산업전사였던 남편은 좀처럼 식탁에 앉을 시간이 없었고 고만고만한 세 사내아이들은 점잖게 식탁에 앉아 밥을 먹기에는 힘이 넘쳤다. 식탁은 아이들이 그 위에 올라가 발을 구르며 노는 놀이터가 되었다.

이듬해 이사 간 아파트는 평수에 비해 부엌이 너무 좁아 그 식탁을 들일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1년 남짓한 사이에 식탁은 거의 폐품 수준으로 변해 버렸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식탁을 새로 살 수밖에 없었다. 5인용이면서 공간에 맞는 사이즈를 고르려니 의외로 힘들었다. 결국 한 가구점에서 겨우 자그마한 원탁을 발견했다. 다리만 길다 뿐이지 사이즈는 친정에서 몇 십 년 동안 썼던 두레반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다음 이사 간 집에서 원탁은 무용지물이었다. 식당도 넓은 데다가 마침 어떤 친척이 미국이민을 가면서 크고 튼튼한 식탁을 물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는 우리 가족사에서 전성기라고 불릴 만큼 집안에 손님이 들끓던 시절이라 그 큰 식탁도 늘 좁게 여겨지기만 했다.

전성기가 있으면 쇠퇴기도 있게 마련. 십 년 전 뜻하지 않은 곤경으로 다시 이사를 갔을 때 그 식탁은 집에 비해 너무 컸다. 게다가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제각기 바빠지자 식탁은 항상 휑했다. 휑뎅그렁한 식탁은 마음까지 외롭게 만들기 일쑤였다. 작은 원탁은 여전히 한 구석에 밀쳐져 있었고.

그리고 5년이 흘러 지금, 원탁은 주방이랄 수도 거실이랄 수도 없는 어중간한 위치, 어중간한 크기의 공간에 마치 맞춤가구처럼 들어앉아 있다. 원탁을 살 때엔 새파랗게 젊었던 나는 어느 새 노년의 입구에 섰는데 원탁은 처음 그 모습 그대로를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의 두레반처럼 처음엔 무척 좁았던 식탁이 시간과 더불어 점점 넓어져 간다. 그 넓고 넓은 원탁에 이제 달랑 부부 둘이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다. 때로는 책도 읽는다. 빈 의자들을 보면 쓸쓸하냐고? 글쎄. 빈 의자는 내 마음속에선 비어 있지 않다. 의자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앉아 있다.

생각나는 CF 하나, 식탁은 가구가 아닙니다. 그건 가족사입니다.

박혜란/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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