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씨의 경우 자살 원인 우울증으로 몰아가며

정작 우울증의 동인과 계기 분석은 없어…”

언론의 침묵은 사회적 우울증 재양산해 내

나는 요즘 우울하다. 영화배우 이은주씨의 자살 때문인데, 곰곰 생각해 보니 그 소식이 우울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왜 죽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우울했던 것 같다. 스포츠 신문과 TV의 연예 프로그램은 '25세의 스타 여배우가 돌연 자살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충격의 증폭과 추모 감정의 확산에서 딱 멈춰 섰다. 그녀는 왜 죽었을까. 마치 이 문제는 말하지 않기로 굳게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연예 언론은 대신에 우울증 타령을 반복하고 있었다. 신문 사회면의 단 몇 줄 기사로 끝나는 무명씨의 자살에도 항시 '빚진 돈' 때문에, '가정 불화'라서, '고질적인 정신 질병' 탓이라는 등 지극히 단순 명료하게 사건을 재구성해온 당사자가 언론이었다. 이에 비하면 이은주씨의 경우는 자살 원인을 우울증으로 몰아가면서도 정작 우울증의 동인과 계기는 분석하거나 진단하지 않는, 참으로 묘한 분위기로 상황을 흐지부지 처리하고 있었다.

일상의 해프닝조차 주인공이 연예인이기 때문에 '기획'과 '창작'을 통해 갖가지 '기발한 특종'을 양산해온 연예 언론도 비극의 죽음 앞이라서 경건한 태도를 보였던 것일까. 고인에 대해선 큰 허물이라도 덮어준다는 미풍 양속을 발휘했던 것일까. 정녕 자살이기 때문에. 나는 이 대목부터 더 우울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자살은 과연 만사의 시비를 뒤덮고 무언의 묵념을 미덕으로 강제하는 최후의 통보 같은 주술적 마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내 우울증은 연예 언론의 그런 모습과 정반대로 봇물 터진 듯 쏟아내는 네티즌의 말과 글을 보면서 조금 가시는 듯했다. 그들은 분명 알고 싶어했고 나름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인지, 그녀가 무엇 때문에 죽음을 택했는지, 그리고 이것은 그녀가 연예인으로서 살아왔던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추측이고 자의적 해석이며 비록 거친 언어로 전달되고 있다 해도 네티즌은 저마다 말을 하고 있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말이 없지만, 곁에서 살고 있는 자들은 애도의 기간이 끝나면, 아니 애도의 기간이라도 말을 해야 비로소 살 수 있다. 그 말을 통해 고인의 죽음을 의미화하고 합리화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찾게 된다. 이은주씨의 우울증이 자살이라는 생물학적 중단을 선택했다면, 그것을 지켜본 이들의 전이된 우울증은 고인의 중단된 말을 회복함으로써 자신의 우울증을 치유하고 극복하게 된다.

그 말이 없다면 산 자는 심리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 휴식과 반전이 없는 우울증은 언제나 죽음 앞에서 취약해진다. 이 점에서 연예 언론은 이은주씨의 자살을 둘러싼 사회적 우울증을 재차 자살의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침묵을 취하고 있다. 반면 네티즌은 우울증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내 우울증이 끝나려면, 이제는 이은주씨의 자살 원인이 아니라 연예 언론이 침묵하는 진짜 속내를 알아야 할 것 같다.

김종휘/ 문화평론가·하자작업장학교 교사·재활용상상놀이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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