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광들에게 만화 리스트를 챙겨 받고, 그 다음엔 못 보고 넘긴 애니메이션들을 챙겨보았다. '이웃집 토토로'는 물론 '귀를 기울이면' '추억은 방울방울' '마녀 배달부 키키' 등 일본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은 정말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거긴 여성 캐릭터들이, 아니 여자아이 캐릭터들이 얼마나 귀엽고 섬세하고 당찬지 보고만 있어도 자랑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마흔 넘은 이 아줌마, 결국은 망가(만화)와 아니메(애니메이션)의 천국, 일본 대중문화탐방 여행에 합류하고야 말았다. 꼭 가고 싶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미술관 지브리 스튜디오, 하하주쿠, 하치라는 영화 속의 개 동상이 세워진 시부야역 등을. 가서 내가 만화에서 본 땅을, 사람을,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참 희한한 경험을 했다. 함께 여행에 참가한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의 면면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한국에서 볼 때는 만화나 텔레비전에 빠져있는 비모범생이거나 날라리로 보일 그들이 일본에서 몇 밤을 함께 돌아다니다 보니 이미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아이들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옷차림도 분방하고 제멋대로여서 조금은 '막나갈 것 같은' 그 애들이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야말로 '집중'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애들은 시간만 나면 그림을 그렸고, 만다라케(중고 만화서점)나 서점에서 산 만화들을 눈이 빠져라 들여다보았다. 그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푹 빠질 수 있는 것, 그 빠져 있다는 것을 당당하게 보이고 표현할 수 있는 것, 세상에선 부적응아로도 보일 수 있을 테지만 그 애들은 그렇게 자기의 행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현명한 아이들이었다. 더 재미있는 사실 하나. 어른이라면 질색을 할 그런 아이들이 가장 연장자이고, 아이들의 엄마인 나에게 너무도 쉽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이다. 감탄사나, 후렴구처럼 '욕'을 달고 말을 하는 그 아이들의 특이한 말투가 하도 재밌어서 다른 어른이라면 눈살을 찌푸렸을 일에 나는 그냥 웃거나 흉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무얼 가르치겠는가. 아이들 왈, 욕하는 거 보고 이렇게 재미있어 하는 아줌마도 처음 보았고, 만화를 그렇게 재미있어 하는 엄마또래의 여자도 처음 보았다는 것이다.
엄마도 아빠도 없이 혼자 그 여행을 떠나온 아이들이 여행 내내 내 뒤를 쫓아다니는 바람에 혼자만의 시간은 없었지만, 마치 만화 속 세계처럼 기이한 여행이었고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다. 떠올려 보시라. 소위 만화에 미친 불량 소녀들 대여섯 명이 나이든 아줌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만화책 이야기만 해대는 모양을… 유쾌하지 않은가.
권혁란/이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