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으련다

- 서정주 詩 '자화상' 중에서 -

어떤 이는 이제 막 어두운 방을 나와 생으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고, 어떤 이는 혼신의 노력으로 일군 생의 업적을 등지고 저 홀로 세상을 뜬다. 삶이라고 해서 꼭 죽음을 가련히 여길 수만 있을까? 세상은 그이의 어깨에 날갯죽지를 달아주느라 여념이 없건만, 나는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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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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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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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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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효 생가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동백꽃

이렇듯 엇갈린 만남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서면 어김없이 선운사다. 10년 전 한 여자로 인해 새카맣게 탄 마음을 안고 찾아든 데도 바로 여기다.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첨벙첨벙 건너며 그까짓 사랑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어깨를 들썩이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뜰에 들어서야 엉엉 울고 말았다. 짐승스런 울음은 이내 달더라, 마치 그녀의 새치름한 입술 같이 달기만 하더라.

선운사 하면 동백꽃이다. 3월 말이면 대웅전 뒤 동백 숲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악마적 관능미…이윽고 예정된 시간이 다하면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그 동백꽃 말이다.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가인 송창식의 '선운사'를 흥얼거리며,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을 굽이돌아 '씨누대밭'과 '붉은 황토'가 살아 꿈틀거리는 미당의 영지로 접어들자 저만치서 낯익은 시비가 다가선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 서정주 詩 '선운사 동구' -

■순백의 금 질량 그대로의 시간

선운사는 백제 때 지어진 고찰로 흔히 천년 사찰이라 불린다. 천년사찰이야 셀 수 없이 많지만, 선운사 만큼 1000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밴 곳은 좀체 드물다. 대웅전의 기둥은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썼는데, 빛 바랜 단청이 자못 쓸쓸하고, 그 앞 돌계단은 거의 무너져 있어 쇠락한 기운마저 풍긴다. 부도 밭은 또 어떤가? 올곧은 소나무 숲 속에 들어있어 아늑하고 정갈하다. 봄소식을 찾아온 도시인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이랄까? 그런 묘한 아우라가 느껴진다. 선운사의 시간은 이처럼 우그러지는 일도, 뒤틀리는 일도, 덜어지는 일도, 더하는 일도 없이 그 '순백의 금 질량 그대로'를 잘 지켜 내려오고 있다.

오랜만에 도솔암 오르는 산책로를 따라 마애불 앞에 서 본다. 선운사 마애불은 도솔암 바위면에 부조로 파낸 높이 17m의 고려불이다. 고려불이 으레 그렇듯 비례며 형태가 투박한 이 부처님은 들일을 하다 허리를 펴고 맞아주는 남도사람처럼 수더분하다. 게다가 시골소년의 그것처럼 파격적인 미소라니…해탈이 어떤 경지인지 잘은 몰라도 아마 저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넉넉한 인상이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부질없이 농짓거리를 걸고 싶어질 만큼.

바보야, 하얀 상사화(相思花)가 피었다. 네 뺨을 타고 흐르는 시퍼런 하늘 밑에. 히히 바보야, 히히 우습다. 질세라 못생긴 부처님이 빙긋 웃으며 내게 이른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 서정주 詩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내 소녀, 어디 갔느뇨

선운사를 나서는 길. 막걸리 집 아낙의 육자배기 가락이 사라진 자리엔 온통 풍천장어와 복분자술의 향연이다. 절집의 예불소리 멀지 않은 곳에 육신의 죄를 부추기는 장어가 지글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삶의 불가해한 양면이 아닐는지.

질마재에 올라서면 풍천(인천강)과 부안 바다의 아우라지가 펼쳐진다. 예로부터 침향(沈香)을 만들려는 이들은, 산골 물이 바다를 만나러 흘러내려 가다가 바로 딱 그 바닷물과 만나는 이 언저리에 굵직굵직한 참나무 토막들을 담갔다. 침향은 수백 수천 년씩 수저(水底)에 가라앉아 있던 놈들을 건져 써야 향내가 제대로 난다고 한다. 1000년을 넘나드는 미당 시의 호흡도 결국 질마재의 물과 흙과 시간이 빚어낸 이 침향 냄새와 다르지 않을 터.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자 너울너울 솟아오른 달이 어루만지듯 저승 곁을 난다. 허나 '서(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나를 지키고 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 속에 내리는 비가 개기만, 다시 그 길 위에 돌아오기만, 그 옛날의 광장 위에서 언제나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잔치는 끝났다. 결국은 조금씩 취해가지고 우리 모두 돌아가는 사람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빈 가지에 바구니만 매어 두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중략) 소녀여. 비가 갠 날은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 어디서 쉬는 숨소리기에 이리도 똑똑히 들리이는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 서정주 詩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중에서 -

글=권경률(여행칼럼니스트)

사진=조재길(사진작가)

[웰빙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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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풍미는 풍천장어와 복분자술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특히 갯벌 풍천장어는 서해 바닷물이 올라오는 풍천(인천강) 어귀에 다 자란 양식장어를 풀어 6개월 동안 순치과정을 거친 것으로일반 양식장어에 비해 담백하고 쫄깃한 육질이 특징이다. 장어구이 음식점은 대체로 선운사 입구에 밀집돼 있다. 1인분에 1만3000원 선.

[가볼 만한 곳]

선운사를 나서면 우선 부안면 선운리 미당문학관으로 넘어가 미당 서정주의 시 세계에 마음을 담가 보자. 전망대에 오르면 질마재 고갯길, 아우라지, 생가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당의 산문시집 '질마재 신화'가 살아 숨쉬는 배경지다.

다음 행선지론 수원 화성 못지않은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고창읍성이 어떨까? 경내의 맹종죽대밭과 아름드리 솔숲에, 3월 하순부터는 벚꽃이 흐드러지니 가족 나들이 장소로는 그만이다. 인근엔 우리나라 판소리 여섯 마당을 집대성한 신재효 선생의 고택이 목련, 개나리 등과 어우러져 객을 맞는다. 예까지 와서도 아쉬움이 남는다면 공음면 학원농장 청보리밭을 찾을 일이다. 20만평 규모의 광활한 대지에 펼쳐진 싱그러운 전원과 목가적 풍광이 으뜸이다.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인가? 변산반도의 채석강이나 내소사를 거쳐 귀경하는 여유도 부려봄직하다.

[찾아 가는 길]

▶자가운전:서해안고속도로 →고창나들목/선운사나들목 →고창읍 →선운사

▶대중교통: 고속버스를 타고 고창까지 가면 선운사행 버스가 많다.

▶문의전화:선운사(063-561-0039), 고창군청 문화관광과 (063-560-2224)

▶홈페이지: www.gocha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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