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않는다. 쉬는 법이 없다. 쉴 줄 모른다. 그렇게 길러져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른 자식들이 역시나 그들의 뒤를 잇는다. 쉬지 않을수록, 쉬는 법이 없을수록, 쉴 줄 모를수록 잘 컸다는 얘기를 들을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인데도 말이다”

-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중에서 -

“이제 세상을 박해하는 것은 총과 칼이 아니야. 바로 프로지! 자본주의의 프랜차이즈말야. 요는, 우리가 어쩌다 프로가 되었나 하는 것이야. 생각해 봐. 우리는 원래 프로가 아니었어. 그런데 갑자기 모두 프로가 된 거야. 그 과정을 생각해 보란 말이야. 물론 프로야구가 세상을 바꾸었단 얘기가 아냐. 단지 프로야구를 통해 우리 모두가 속았다는 거지.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낭만을!'이란 구호는 사실 '어린이에게 경쟁을! 젊은이에겐 더 많은 일을!' 시키기 위해 만들었다고 보면 돼. 그런 의미에서 삼미 슈퍼스타즈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도 같은 존재지. 그 프로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모든 아마추어들을 대신해 모진 핍박과 박해를 받았던 거야”

-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팬클럽'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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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 말 투 아웃에 주자는 만루. 나는 양 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 어금니를 깨문 채 타석에 들어섰다.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날아올 마지막 공 하나에 내 운명이 달려 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심정으로 두 눈을 치켜떴다. 그 때였다. 그런 날 지켜보던 투수가 허파가 뚫린 사람처럼 웃으며 데굴데굴 구르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그건 또 하나의 나였다.

삼미슈퍼스타즈와 홍대입구의 공통점은…

82년 그룹 놀란스의 '섹시 뮤직'이란 노래가 한반도 남단의 디스코장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던 그 해 봄 동대문야구장에선 프로야구가 역사적인 출범식을 가졌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에 프로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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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입구는 삼미 슈퍼스타즈처럼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마이너리티들이 쉬고, 놀고, 뒹구는 휴식 같은 공간이다.

누구는 연봉이 얼마래. 넌 연봉이 얼마지? 열심히 해, 너도 할 수 있어. 한눈팔지 마! 팀을 위해 사생활을 포기하는 건 당연하잖아. 오늘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뛰어! 네가 그러고도 프로야? 너 이 세계가 얼마나 냉정한지 몰라. 뭐? 맘대로 해. 너 아니면 뛸 선수가 없을 것 같아? 힘들면 나가! 둘러 봐. 다들 똑같은 조건에서 너보다 더 잘하고 있잖아. 힘든 걸 이겨내는 게 프로야. 몸이 힘들면 정신력으로 이겨내! 올해 목표도 우승이다. 던져! 달려! 잡아!

결과만이 정답인 프로의 세계. 허나 그해의 그라운드엔 '야구를 통한 자기수양'을 외친 아마추어리즘의 화신이 기적처럼 존재했으니 그 이름도 찬란한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그해 가을 삼미 슈퍼스타즈가 받아든 성적표는 5승 35패의 경이적인 것이었다. 그랬거나 말거나 그들은 정말이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았고, 잡기 곤란한 공은 잡지 않았다.

프리마켓, 힙합, 술집골목 등 B컷의 배경

삼미 슈퍼스타즈는 사진으로 치면 B컷이다. 프로의 세계가 요구하는 A컷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B컷이라고 해서 얕보면 큰코다친다. 현실적인 논리에서 밀린 사진일 뿐, 작가의 개성이나 새로운 트렌드를 드러내는 쪽은 오히려 B컷일 가능성이 높다. 홍대입구는 삼미 슈퍼스타즈처럼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B컷들이 쉬고, 놀고, 뒹구는 휴식 같은 공간이다.

토요일 오후 홍익대 놀이터 앞에 들어선 프리마켓에선 찢어진 티셔츠와 가죽옷으로 무장한 병아리 작가들이 장신구, 공예품, 패션소품을 놓고 손님들과 흥정하는 데 여념이 없다. 천생 예술가인 탓에 코트 깃을 여미며 깔끔 떠는 여학생들 앞에서 쩔쩔 매는 모습이 여간 애처롭지 않다. 이곳에서 파는 상품은 이른바 '과정의 예술품'이다. 평소에 예술품을 알아보는 안목을 길러뒀다가 로또하는 마음으로 물건을 골라보자. 단돈 3만원에 구입한 수공예 인형이 20년 뒤 수억 원의 가격에 거래될지도 모를 일.

놀이터를 지나면 구청에서 운영하는 공영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을 따라 클럽, 노래방, 레스토랑이 줄지어 늘어섰다. 이곳은 새벽 무렵이 진짜다. 싸구려 금붙이를 주렁주렁 달고 야구모자에 트레이닝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힙합 음악을 흥얼거리며 나타나 유치찬란하게 놀다 간다. 간혹 이 불온한 공간에서 세월의 금 밟기를 시도하는 철없는(?) 30대들의 모습도 여전하다.

거리마다 개인의 다양한 욕망 분출 풍경

전통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으레 '마이너리티'라는 닉네임을 얻는다. 주류로부터 어느 정도 '격리'를 꾀하는 탓이다. 자의든 타의든 마이너리티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것들을 재발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주차장에서 홍대 전철역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재미난 이름의 바와 카페, 술집들이 골목골목 숨어 있다. 'Bar다' '곱창전골' 등 해괴한 이름에 걸맞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온통 유배당한 마이너리티 천지다. 가만히 구석에 자리잡고 그 대화란 것을 엿듣다 보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들은 이 어두컴컴한 곳에 웅성웅성 모여 앉아 집단적 최면의 실체를 향해 잽을 날리고, 개인의 욕망과 역사를 다시 읽는다. 그러다 알코올이 좀 더 오르면 이런 저런 문화코드를 읊기 시작한다.

서태지의 '괴수대백과사전'에서 '쿵푸허슬'로 돌아온 코미디의 신 주성치에 이르기까지 하여간 좌충우돌이다. 가게의 스피커에선 도어스의 'Light My Fire'가 가늘게 점화되고 있었고, 원수 같은 술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다시 9회 말 투 아웃에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공은 조금 전에 들어왔다.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외치며 삼진아웃을 선언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공은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다. 이제 나는 1루로 나가 쉴 테다. 자고, 놀고, 뒹굴 테다. 유치찬란하게 놀다가든, 금 밟기를 시도하든, 마이너 취향에 젖어 보든 누구나 받아주는 신기한 동네에서.

찾아 가는 길

2호선 홍대전철역에 내려 홍익대 정문을 향해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른다. 정문 앞이 놀이터, 놀이터 안쪽이 주차장, 주차장 아래쪽이 맛집이 많기로 소문난 '허름한 골목'이다.

가볼만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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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전철역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재미난 이름의 바와 카페, 술집들이 골목골목 숨어 있다.

●Bar다

홍대 주변에서 가장 허름한 골목에 위치한 두어 평 남짓 작은 공간. 이곳은 여자 혼자 앉아서 칵테일을 마셔도 뒷골이 땅기지 않는 바(Bar)다. 사장님 교양 있고 알바생 친절하다. 찾아가기가 어려운데 스타벅스 홍대점 맞은편 골목으로 20m쯤 올라가다가 완쪽을 보면 2층에 큰 바다(Sea) 사진이 보인다. 1층은 예쁜 소품점 '킨쿄'.

●곱창전골

'Bar다'에서 주차장 쪽으로 50m쯤 더 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빠지면 '곱창전골'이라고 쓴 간판이 나타난다. 술집 이름이 이렇다. 이 집은 흘러간 옛 가요가 전문이다. 70년대부터 최근까지 가요를 신청하면 웬만큼은 틀어준다. 소주에 홍합탕을 시켜놓고 듣는 산울림은 LP판이라 그런지 울림이 더 크더라.

주의사항1. 무슨 심보인지 밤에 간판 불을 안 켠다.

2. 팝송은 웬만해선 안 틀어준다.

●아지오

넓고 깔끔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모여서 수다떠는 장소로는 그만이다. 선남선녀들이 소개팅 및 연애를 일삼는 곳이니 독신들은 약간의 쏠림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다. 놀이터에서 극동방송국 쪽으로 가다가 삼거리 못미쳐 오른쪽 골목으로 꺾으면 나온다.

글=권경률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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