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기획인터뷰 '박이은경이 만난 2005년을 달리는 사람'을 통해 신년호부터 대한민국 각계각층 다양한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만나 2005년 현재를 살아가는 진솔한 얘기들을 싣습니다. 그 첫 회로 마흔이 넘어 운전을 배워 삶의 전환을 이루고 정년 은퇴를 3년 앞둔 9703 좌석버스 제일여객의 왕언니 이명자(57) 운전기사의 달리는 얘기를 소개합니다.

마흔 넘어 늦깎이 운전대 14년 경력 최고참

버스기사 되려고 9년간 단계별로 경력 관리

만취 승객 살살 달래 목적지까지 가면 '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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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자 기사가 일산 차고지에서 시청 앞을 향해 출발하기 직전 후배기사의 배웅을 받고 있다. 이 기사는 15명 여기사들 중 최고참으로 든든한 선배 역할을 하고 있다.

<이기태 기자 leephoto@>

일상 속에서 분초를 다투며 사람들이 기대하는 역할과 책임을 되풀이하여 충실히, 그것도 기꺼이 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일산 탄현에서 출발해 시청 앞, 광화문을 거쳐 다시 일산으로 회귀하는 2시간 남짓 코스를 운행하는 9703 좌석버스 최고참 여성기사 이명자(57)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어이 속상해, 왜 이렇게 멕혀…짜증나 죽겄네, 혼잣말 하다가도 갑자기 뚫리면 '아이고, 속시원해라'하고 말죠, 뭐. 접촉사고 나 내가 잘못했으면 그냥 인정하고, 상대방이 잘못해 설명을 차근차근 해도 자꾸 큰소리 내고 우기면 112에 사고접보 시켜버리면 돼요. 뭐 하러 싸워요? 경력이 쌓이다 보니 싸울 필요가 없더라고요. 이 교통지옥 한가운데서 별 답답함 없이, 오히려 3년 남짓 남은 정년까지 흘러갈 시간들이 알토란 같다. 운전기사 53명 중 여성기사가 15명이나 되는 제일여객에서 이 기사는 한 동료 남자기사의 말처럼 “인생도 베스트, 노래도 베스트, 운행도 베스트” 평을 듣는 왕누나이자 왕언니이다. 유일한 고민거리가 있다면 백발을 2주에 한 번 염색하느라 머릿결이 점점 나빠진다는 것.

“흰 머리인 채 운전하면 저렇게 나이 먹은 사람도 운전 하느냐고 승객들이 불안해할 거 아니에요? 흑발로 염색해도 어린 녀석들은 '할머니가 운전해요?'하곤 해요. 그러면 껌도 주고 사탕도 주고 하면서 '이 놈들아, 할머니가 뭐냐? 이제부터 누나라고 해라' 하죠”

이명자씨는 42세에 처음으로 운전면허를 딴 늦깎이 운전기사다. 그 전까지는 집에서 할 수 있는 가내수공업을 부업으로 이것저것 했다. 1종보통 운전면허를 딴 후 가구공장에서 일하며 12인승 승합차를 6년 운전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85번 버스 단발머리 여자 운전기사가 너무나 부러워 무턱대고 대형면허를 딸 결심을 했다. 남자들도 보통 3회는 떨어지는 시험에서 그는 무려 20번 도전 끝에 대형면허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단박에 버스회사에 달려가기보다는 20인승 어린이집 버스, 35인승 마을버스를 각각 1년 반씩 견습 운전하는 커리어 관리(?)를 했다. 그러다가 꿈에 그리던 85번 버스회사에서 여기사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응시, 합격해 2년여를 정말 신나게 달렸다.

그러나 새벽에서 자정, 또 새벽에서 자정, 이렇게 이틀 연속 일하고 하루 쉬는 근무조건이 가사와 병행하기 힘들어 진이 있는 대로 다 빠졌다. 그래서 오전·오후 반으로 하루 2교대를 하는 지금의 버스회사로 옮겼다. 그 때 나이 52세. 입사 직후 '왕회장'(우정록 제일여객 회장)이 “(여자 운전기사들은 남자 운전기사처럼 대형사고를 안 내서) 여기사를 많이 선호한다”며 그의 손을 잡고 “한창 일할 나이에 여기 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환영해줘 힘이 됐다.

“운전기사가 타고난 천직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 다니던 어릴 때도 버스를 타면 늘 앞자리에 앉아 운전기사가 기어 넣고 페달 밟는 것을 유심히 보곤 했으니까요. 신혼 때 전세 살 때도 주인집 아줌마가 택시기사 면허 따서 운전해보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말했다니까요…그러다가 세 살배기 둘째 아들이 경기로 갑자기 죽자 한 달 사이 체중이 5㎏이나 빠지고 7∼8년간은 아무 생각 안 나더군요…그때 살던 강원도가 너무 싫어져 무작정 서울로 와 자리잡았어요”

이씨가 볼 때 버스 운전기사는 정말 평등한 직업이다. 동료기사들과는 남녀 구분 없이 편하게 '야∼, 자∼'하는 자유로움이 있고, 승진도 성별 경력과 무관하게, 연봉도 성별 경력과 무관하게 3000만원 넘게 받는다. 차이가 난다면 근속 연수에 따라 1년에 1만원 정도 붙는 것이나 고참일수록 새 차를 배당받는 정도라고나 할까. '사고'라는 복병만 최대한 주의하면 된다.

“나 역시 의사 못지않게 생명을 다루고 가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잠깐만 딴 데 신경 써도 금방 앞에 어떤 상황이 닥치게 되고 사고와 직결되니까요. 큰 사고가 나면 자진 사표내야죠”

한동안 승객의 버스기사 폭행사건이 문제가 된 적도 있었지만, 만취한 승객도 골칫거리다.

“술 취한 승객이 올라타면 말하곤 해요. 멀리 가지 마시고, 요 가까이 앉으시라고. 그리고 행선지가 어디인지 물어 꼭 깨워드리죠. 종종 뒤로 고집스럽게 가는 만취 승객에 대해선 주변 승객 분들께 '저 분 꼭 깨워주세요' 부탁하곤 해요. 그저 살살 달래 목적지까지 가게 하는 게 최선이죠, 뭐”

그가 버스기사를 시작한 5년 전과 지금은 그가 느끼기에도 여자 운전기사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고, 그는 이를 '사회 발전'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여자기사라고 깔봤지만 요즘엔 '운전수'가 아닌 '기사 분'으로 깍듯이 불러주고, 여자가 큰 차 운전한다고 부러워하기까지 하죠. 때론 나이 드신 아주머니들이 '남자직업 여자가 다 빼앗으면 남자가 설 자리 없으니 집에 가서 살림이나 하라'고 핀잔도 주지만, 어떤 아주머니는 대형면허를 땄다며 그 회사에 취직자리 있냐고 물어보기도 하죠”

옛날엔 운전기사를 떠돌이 직업 정도로 알았는데, 요즘은 지난해 한 해만도 월급이 16% 이상 올랐고, 배차 간격도 3시간으로 늘어나 훨씬 근무조건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직률이 많이 떨어진 것은 당연.

“이러니 저러니 말도 많지만 아무튼 사회는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아요. 대중과 많이 접하다보니 생각 자체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들을 실감해요. 5, 6년 전만 해도 종종 술 취해 싸우고 패는 일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사람은 거의 못 보겠고, 다들 열심히 살려고 노력들 많이 하잖아요. 새벽에 차를 몰다 보면 60, 70 먹은 노인들이 유모차에 빈 박스를 수집해 가득 채우고 가는 것을 보곤 하는데, 한편으론 가슴이 좀 아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보기 좋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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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실에서 동료들과 어울린 이명자 씨. 그는 운전기사의 세계야말로 남녀구분이 없다고 자부한다.

박이은경 편집국장pl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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