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좀 거창하게 말하면, 하루가 멀다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꼬리를 잇는 이 세상에서 건망증이라도 있으니까 희희낙락하고 살지 어떻게 살겠어. 그런데 결정적으로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길을 걷다가 혹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다가 어떤 순간 떠오른, 아 이거다! 싶었던 아이디어들이 몇 시간만 지나면 까맣게 지워진다는 것. 너무 기발하고 너무 재미있어서 도저히 잊히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아이디어가 그토록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다니.

또래들이 모이면 건망증에 대한 사례들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휴대폰을 냉장고에 넣어둔 채 온 집안을 뒤졌다는 이야기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고, 모임에 나갈 때는 자기 차를 타고 나갔는데 돌아올 때는 택시를 잡아탔다는 이야기도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택시 잡기가 어려웠던 시대를 살았던 우리 세대다운 일화다.

자신의 경험을 넘어 '∼카더라' 식으로 범위가 넓어지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만한 이야기들이 쌔고 쌨다. 딸의 결혼식 날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들렀는데 그 사실을 깜빡 잊고 다른 데 갔다는 이야기(휴대폰이 보급되기 전이었겠지만)나 손자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가 혼자 돌아온 이야기 등.

화제의 막바지는 항상 여자들이 왜 건망증이 심한가에 대한 나름의 분석과 이러다가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치매에 걸리는 게 아닌가라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모아지고 그러면 이내 건망증과 치매의 다른 점에 대해서 열띤 토론이 이어진다.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치매에 대한 공포심이 워낙 크기 때문에 좀 속보이는 짓이긴 해도 건망증이 치매와 별로 연관성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려야만 그나마 마음을 놓고 헤어진다.

드라마틱한 사건에까지는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나 역시 건망증이 나날이 심해간다. 아무리 젊은 척 해봤자 그 많던 뇌세포들은 시시각각 어김없이 줄어들고 있으니 별 수 없는 노릇이지. 사람 이름 까먹는 건 건망증에도 속하지 않는다지? 집 열쇠를 어디다 놓았는지 잊어 버려서 약속시간에 늦은 경우도 드물지 않고 얼마 전에는 틀림없이 가방에 얌전히 들어 있을 줄 알았던 콘서트 티켓이 사라져서 온 집안을 뒤집었다. 이젠 포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 티켓은 기적처럼 발견되었다. 티켓이 그곳에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던 아주 엉뚱한 곳에서.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곳을 뒤지게 되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불가사의.

분명 필요한 것이 있어서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아무리 해도 생각이 안나 그냥 문을 닫은 일은 부지기수이다. 그렇다고 냉장고가 크기나 하면 말을 안 하지. 내용물이 한눈에 빤히 들어오는데도 뭘 꺼내려고 했는지 모르겠으니 애꿎은 생수나 벌컥벌컥 들이킬밖에. 된장찌개에 넣을 두부를 사러 슈퍼마켓에 뛰어 갔다가 철을 잊은 딸기를 싸게 준다는 바람에 그것만 덜컥 사서 돌아오기도 하고. 바로 어제 토마토를 한 상자나 샀는데 잊어먹고 오늘 또 한 상자 사고.

저녁에 외식을 할 경우 꼭 갖고 나가야 할 각종의 약들을 번번이 챙기지 못하는 건 말할 거리도 안되고, 마감 날 마감 시간 직전에 공과금 낸다고 은행으로 달려갔는데 고지서를 식탁에 남겨 두었을 때는 좀 많은가. 딴에는 챙긴다고 챙겼는데.

그렇다고 뭐 별 걱정은 안 된다. 건망증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 싸가지 없는 사람 때문에 아무리 불쾌했더라도 하룻밤 자고 나면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으니 건망증이여, 영원하라다. 또 남편한테 화를 낼 일이 있어서 여보 하고 불렀는데 얼굴을 보자 화낼 일이 뭔지 도대체 생각이 안 난다. 그냥 웃어야지 뭐.

또 있다. 명절 때마다 TV에서 재탕 삼탕 해주는 성룡 영화나 다이하드 시리즈, 기억력 좋은 사람은 지겹겠지만 나 같은 건망증 환자는 볼 때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기분이니 그것도 괜찮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하루가 멀다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꼬리를 잇는 이 세상에서 건망증이라도 있으니까 희희낙락하고 살지 어떻게 살겠어.

그런데 결정적으로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길을 걷다가 혹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다가 어떤 순간 떠오른, 아 이거다! 싶었던 아이디어들이 몇 시간만 지나면 까맣게 지워진다는 것. 너무 기발하고 너무 재미있어서 도저히 잊히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아이디어가 그토록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다니. 그 아이디어들만 되살릴 수 있다면 나는 벌써 몇 십 권의 소설책을 써냈을 것 같다. 단편에 장편에 대하소설까지(이런, 문학소녀의 꿈을 들켜버렸네).

이 사람 참 딱하기도 하네. 그럼, 메모를 하면 되잖아. 번쩍 하는 아이디어를 그 순간 잡아넣을 메모장을 갖고 다니라고.

아이고, 그 생각이야 늘 하지. 하지만 정작 메모를 할 순간이면 메모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걸 난들 어떻게 하나. 달리 건망증인가. 바로 그게 건망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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