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

학교 교육에 관해 오래간만에 기쁜 소식을 들었다. 아이들은 다 컸고 남편이 제대 후 새 직장을 구하는 사이 초등학교 교사 임용 시험에 도전한 한 후배의 이야기인데, 나이의 제한 때문에 서울이나 경기지역에서는 자격을 얻을 수 없던 그는 천안 근교의 한 농촌 초등학교에 배치되어 남편과는 주말 부부가 되는 불편을 겪고 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왜 서울이나 경기 지역에서는 선생님이 될 수 없고 충청도에서는 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어쨌든 시골의 초등학교 2학년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 그 교사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듯하다. 농사일에 바쁜 부모들이 완전히 학교에 맡겨 놓고 있는 아이들은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대로 흡수하며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쑥쑥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쁨에 그는 집 생각도 다 잊어버릴 정도로 한 주가 지나간다고 했다.

올 한 학년 동안만 해도 아이들에게 읽힌 책이 120권이 넘는다니 그 자양분이 어디로 갈 것인가. 그 교사 같이 교육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 외국 생활에서 얻는 풍부한 경험까지 겸비한 교사를 담임으로 맞은 그 초등학교 아이들은 참으로 행복한 학생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근본적인 힘, 배움에 대한 사랑과 기쁨을 그들은 이미 기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 특히 우리나라의 교육 논의에서 평등의 문제 만큼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그 논의 속에서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교육의 핵심이며 기회의 평등인가 하는 것이다.

평준화된 고등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교육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는가? 겉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번에 드러난 대형 수능시험 부정 사건은 평준화라는 틀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학교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속이 빈 것인가를 더 이상 적나라하게 드러내려야 드러낼 수가 없다는 증거다.

학교 교육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가. 더 말 할 것 없이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사랑과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신뢰와 존경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근간으로 해서 형성되는 학생 상호간의 우정이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형제 간의 우애와 직결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원리이다. 학교라는 공동체를 통해 이뤄내야 하는 교육의 기본은, 배움을 사랑하고 즐기는 습성과 같은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협동하고 사는 것이 싸우며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이다. 만약에 교사와 학생들 간에 인격적 관계가 깨지고 나면 사실 학교교육은 무너지는 것이며 독학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학교에서는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고 독학을 할 자신도 없기 때문에 부모들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과외공부나 조기 유학이다.

교육에서 기본을 생각한다면 일찍부터 대학 진학만 의식해서 또는 특기를 개발한다는 명분으로 자연스럽게 뛰어 놀거나 혼자 책을 읽을 틈이 없이 학원에서 학원으로 실려 다니는 도시의 아이들이 좋은 선생님의 지도 아래서 일찍부터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이는 농촌학교 아이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는다고 보기 어렵다. 일찍부터 많은 책을 읽는 습관을 기른 아이들은 삶에 관계되는 핵심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찾는 태도가 몸에 배게 마련인 반면 문제풀이 연습을 통해 시험에 필요한 요령만 배운 아이들은 어려운 현실에 부닥쳤을 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능력에서는 오히려 뒤떨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과 지방 간, 부유층과 빈곤층 간 교육기회 평등을 보장해 주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좋은 선생님들을 지방으로 유도하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험에 가산점을 무원칙하게 허용하는 것보다 본질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고기를 잡아다 주는 것보다 낫다는 이치가 특히 교육에서는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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