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이 동네에 이사온 지도 벌써 20년이 지났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이후였고 나도 40, 50대를 정신없이 휘몰아쳤기 때문에 그 긴 세월 동안에 동네친구를 사귈 기회는 전혀 없었다. 나의 어머니는 똑같은 세월 동안 평생친구를 여럿 사귀었는데…

지난 여름 유소림씨의 따뜻한 가족이야기 '살아 키우시고 죽어 가르치시네'에 추천사를 쓴 적이 있다. 안면은 있었지만 저자에 대해서 이렇다 할 사전 지식은 없는 채 재미있게 읽어 나갔는데 아이고, 반가워라, 예전에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닌가.

사실 서울의 변두리 동네라는 것이 다 고만고만한 모양새라 지형지물의 특색으로 동네를 알아보기는 힘든데 글 속에 아주 낯익은 사람이 등장하는 거였다. 고물장사 아저씨였다. 인상은 산도둑처럼 험했지만 사람 좋은 웃음이 일품이었던 그 아저씨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조금은 낯설었던 저자가 갑자기 동생처럼 다가왔다.(지역감정의 단초?)

그 아저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을 드나들었고 뒤란에 쌓인 쓰레기더미에서 용케도 쓸만하다 싶은 걸 골라내었다. 어떨 때는 어머니가 따로 치워놓았던 물건을 끌어내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아저씨는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때웠을 뿐 미안해하거나 무안해 하지도 않았다. 우리 6남매는 거의 매일 아저씨가 고물의 양과 상관없이 듬뿍듬뿍 퍼주는 강냉이로 입이 즐거웠다.

20년을 살았는데도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살던 옛날 우리 동네가 고물장사 아저씨를 통해 살아나면서 가슴이 아릿해 오던 순간이었다. 처음 봤을 땐 힘이 넘쳤던 그 아저씨도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졌었는데 지금쯤 어떻게 살고 계실까. 아마 벌써 이 세상을 떴을 거야. 그러고 보면 추억이란 게 별게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이 동네에 대해 어떤 추억을 갖게 될까. 비록 아파트를 두 번이나 옮겼지만 이 동네에 이사온 지도 벌써 20년이 지났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이후였고 나도 40, 50대를 정신없이 휘몰아쳤기 때문에 그 긴 세월 동안에 동네친구를 사귈 기회는 전혀 없었다. 나의 어머니는 똑같은 세월 동안 평생친구를 여럿 사귀었는데, 아, 이 삭막한 인간성이라니.(어머니 시대와 당신의 시대는 다르지 않느냐고 위로해 줄 필요 없다. 시대 탓도 크지만 사람 탓도 그 못지않으니까)

하지만 혹시 먼 훗날에 우리 동네를 추억할 때 항상 함께 떠오를 사람은 하나 있다. 그게 누구냐고? 우리 동네 떡장사 아주머니. 어제도 그를 만났다.

우리 동네에는 비슷한 규모의 슈퍼마켓이 네 군데나 있다. 젊었을 때는 한 푼이라도 싼 곳을 찾아다니느라고 발품을 팔았지만 요즘은 한 걸음이라도 가까운 곳을 찾기에 거의 우리 집 바로 앞 상가 슈퍼마켓을 찾는다. 왕복 5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런데 그보다 조금 먼, 그러니까 왕복 10분쯤 걸리는 슈퍼마켓을 가끔 찾게 되는데 그 이유는 순전히 떡장사 아주머니를 보기 위해서다. 아주머니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지, 장사는 잘 되는지, 몸은 어떤지 그것이 궁금해서이다.

이 동네로 이사온 지 얼마 안 돼서였다. 어느 날 저녁 늦게 귀가하는데 아파트 쪽문 옆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떡 싸게 드릴 테니 떨이 좀 해주세요. 등에 아이를 업은 한 아주머니가 그 컴컴한 구석에서 두어 봉지 남은 떡을 들고 내게 말을 붙여온 것이었다. 아주머니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늘 떨이 손님이었다. 어떨 때는 대여섯 봉지도 샀다. 내가 사야 아주머니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난 늘 의무적으로 떨이를 해야 마음이 편했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모두 떡보가 되어갔다. 밤에 들어와서 식탁에 떡 봉지가 없으면 섭섭해들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떡을 팔았다. 언젠가 며칠 안 보여서 어디 아팠냐고 물었더니 큰딸을 시집보냈다고 했다. 혼수를 오백만원 어치나 해 주느라고 혼났다는 아주머니의 얼굴은 아주 자랑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아주머니는 슈퍼마켓 입구에 매대를 얻었다. 그리고 방앗간도 차렸다. 어느 새 나는 더 이상 떨이 손님이 아니었다. 장사도 잘 됐을 뿐더러 우리 집에도 떡 먹을 입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제 오랜만에 팥시루떡을 한 봉지 샀다.

“요즘엔 떡 살 일이 없어서 미안하네요”

“아이고, 미안하긴요. 옛날에 정말 엄청 사 주셨잖아요”

“집에 떡 먹을 사람이 없어요. 다 커버려서”

“우리 집에도 영감하고 둘만 달랑 남았어요. 뭐든지 그냥 남아서 다 버려요”

“시간이 참 빠르지요?”

“그러게 말이에요. 눈 한 번 꿈쩍 감았다 뜨니까 세월이 다 가버리네요”

우린 그렇게 한 동네에서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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