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

수능시험이 끝난 뒤 각 신문에 공개된 문제와 정답들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참담하기 짝이 없는 느낌이다. 나는 거의 평생 서양 역사를 가르쳐 온 선생이고 영어도 제법 하며 외교관 생활도 무난히 해낸 경험을 가진 사람이지만 언어, 영어, 사회탐구 어느 영역을 보아도 내가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미국에서 실시되는 SAT나 핀란드의 고교 졸업시험 문제집을 대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왜 우리 젊은이들은, 시험을 보는 입장에서나 가르치는 입장에서나, 이런 이상한 시험을 치르기 위해 그처럼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고 국가와 부모들은 천문학적 수치의 교육비를 쏟아 부어야 하는가.

지식보다 문제 푸는 '기술' 테스트

수능의 문제는 구조적인 것이지 출제를 위해 수고하신 분들 개개인에게 책임을 돌릴 생각은 없다. 내가 출제위원으로 불려 다니던 20여년 전에도 이미 대학 신입생을 선발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객관식 표준시험에는 결함이 많다는 것이 지적되었고 여러 가지 보완책이 시도되었다. 시험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고력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주관식 출제로 객관적 출제의 한계를 보완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하게 대두했다. 또 영리를 위해 부정을 저지를 가능성을 막는다는 목적으로 지난 몇 해 사이 출제되었던 문제는 다시 출제할 수 없다는 규정도 만들었다. 그런데 그러한 여러 가지 보완과 개선책의 축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는 오늘의 수능시험 문제들을 보면 사공이 많다 보니 오히려 배가 산으로 올라갔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언어 영역이고 사회 탐구 영역이고 공통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질문과 대답 사이의 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문항마다 노리는 효과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가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답이 틀렸을 경우 수험자가 내용을 몰라서 틀렸는지 아니면 기술상의 혼선 때문인지 알기가 어렵다. 이러한 출제 양식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 다시 말해 특수한 방식의 문제풀기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깊은 지식이 있어도 답을 하기가 어렵고 어떤 경우는 깊은 이해가 오히려 정답 맞히기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비비 꼬인 출제 양식이 사고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가 아닌가 싶다.

전문가도 풀기 어려워…실력 판가름 안돼

또 한 가지 특징은 영역마다 고등학교 졸업생이면 누구나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을 테스트하기보다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고는 대학 교수들도 답하기 어려운 매우 현학적인 문제가 많다는 점이다. 언어와 사회 탐구 전 영역을 통해 원전을 인용하는 것이 최근의 출제 추세인 듯한데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학생들도 못하는 원전 읽기를 하는가. 내용을 좀 더 들여다 보면 그것은 대체로 겉멋 부리기에 불과한 것이고 역사나 사회에 관한 기본 지식을 갖추지 않고도 글을 정확하게 읽고 추리하는 능력만 있으면 풀리는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설사 국사나 세계사에서 만점을 받고 입학하는 학생이라 해도 그 시험을 전혀 보지 않은 학생들보다 국사나 세계사에 관한 기본 지식을 얼마나 더 갖추고 있는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합리적 문제은행제도 정착돼야

과목마다 고등학교 졸업생이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에 대한 질문보다는 이상하게 지엽적이고 현학적인 문제들이 등장하는 것은 근년에 출제된 문제들을 다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 규정이야말로 단세포적 사고의 대표적 사례이다. 시험의 목적이 학생을 떨어뜨리는 데만 있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배우게 하는 데 있다면, 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라면 반복 출제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 놓아야지, 그렇지 않다면 성적 올리기에 여념 없는 학원이나 학생들은 어느 과목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다 빼 버리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기 때문에 일찍이 출제 대상이 되지 못했던 지엽적 사실들 가운데서 출제가 될 듯한 것들만을 점쳐서 골라내는 데만 바쁠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라도 지금 같은 식의 출제제도는 하루 빨리 폐기되고 많은 연구와 검토를 거쳐 깊이 마련된 많은 좋은 문제들에서 무작위로 뽑아 출제를 하는 문제은행제도를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