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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억력이 부족한 우리 사회는 김대중 정권시절부터 국무총리실 소관으로 3년을 준비한 '성매매 특별법'이 지난 3월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당시 다수당은 한나라당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당시에는 요즘 호들갑을 떠는 어떤 언론에서도 이 법안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문제를 마치 '좌파 노무현 정부의 섣부른 개혁'이나 여여(女女)갈등으로 몰고 가는 언론이나 그것을 수수방관하면서 여성부와 여성단체들에 모든 해결책임을 전가하는 정부부처나 한나라당의 태도는 모순과 무책임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과 가려진 성에 대한 태도와 잣대가 이렇듯 다른 나라가 또 있을까. 자신의 공식 파트너에게는 할 수 없는 행위가 성매매 여성을 비롯한 서비스업 여성들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회의 이중기준은 분명 폭력이다. 돈이나 권력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힘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한국여성사를 수강하는 여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남성들은 으레 성매매의 경험이 있으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화끈한 여성인 양 착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편견 속에서 사랑과 성매매는 별개라고 여기는 남성들은 오히려 왜곡된 성관념에 의해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사실 성매매에 대한 왜곡된 생각은 결코 남성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바람피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며 남편의 성매매를 다행(?)으로 여기는 아내는 없는지, 딸의 임신 중에 사위에게 성매매할 돈을 주었다는 호탕한(?) 장모는 없는지,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딸이나 며느리를 설득하는 어머니들은 없는지 돌아보자.

성매매 여성을 '사회의 하수구'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 속에서, 성매매금지법이 경제에 해악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개발독재론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천박스런 단면이 드러난다. 성매매를 통해서라도 남성의 욕구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나 성매매를 행복추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일본 '군위안부'문제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위안부' 동원 역시 이와 동일한 논리가 아니었던가.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라는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일본인 병사들이 자신들은 연애를 했다고 회고하는 반면 일본'군위안부'들은 자신이 성적으로 착취당했다고 받아들이는 부분이었다. 사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성행위일지 모르나 팔아야 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성착취일 뿐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매매는 취향이 아닌 폭력에 다름 아니다.

나는 결코 국가가 개인의 성적 취향과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앞으로 성에 대한 담론이 음습한 밀실이 아닌 열린 광장으로 나와 우리 사회의 공식적인 엄숙주의와 비공식적인 섹스산업의 번창이라는 이중적 성 기준과 시스템을 극복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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