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와 젠더 경계 오가며 교묘한 줄타기

대중문화 시스템 속 '여전사'보다는 '생존자' 의미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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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인(Mia donna)', 혹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지칭하던 이름이 자신의 것이 되면 어떤 기분일까. 마돈나 루이즈 베로니카 치콘느(Madonna Louise Veronica Ciccone), 마돈나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마돈나는 서양 대중음악사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발표하는 음반들은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고, 자신이 최고 경영자인 음반 레이블을 소유하고 있으며, 남편 없이 아이를 낳고, 대(對)이라크전이 한창이던 때에 부시를 희롱하는 뮤직비디오를 찍기도(물론 자진해서 수정했지만) 한 그는 이미 가장 커다란 별이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

83년 데뷔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 당시 미국은 정치적으로는 레이건의 신보수주의가 정립되던 시기였고 문화적으로는 MTV의 등장으로 팝 문화에 혁신이 이뤄지던 시기였다. 그 속에서 '처녀처럼(Like A Virgin)'으로 스타덤에 오른 마돈나는 섹슈얼리티와 젠더 사이를 교묘하게 유영해 왔다.

그는 80년대를 정면으로 관통하여 살아남은 몇 안되는 여성 음악가이다. 섹스를 손에 든 그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항상 도발적이었으며 마돈나 곁에는 항상 불공평한 비난과 부도덕한 루머들이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정치적으로(혹은 영악하게)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고, 20년이 지나자 살아있는 팝 아이콘이 되었다.

사실 마돈나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 이후였다. 마돈나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는 아예 '마돈나학'으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시대가 몰라봤던 이 위대한 여성을 그제서야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했던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짐작하자면, 우선 문화적으로 '마돈나'라는 브랜드를 경험한 세대가 90년대에 이르러 사회·경제적으로 무언가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일 테고 다른 하나는 90년대에 이른바 2세대 페미니즘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여성주의적 관점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적으로는 평론가의 대다수가 남성이라는 점과 여성주의 대중문화 비평의 역사가 짧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90년대의 얼터너티브 무브먼트가 '록의 신화화'를 해체하던 점과 맞물리며 팝음악에 대한 재해석이 가능해졌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동양이든 서양이든 '딴따라' 중에서도 '여성 딴따라'가 제대로 대접받으려면 십수년이 걸린다는 푸념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마돈나는 비로소 대단한 여자 딴따라다. 그것은 그가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경계에서 싸우던 여전사여서가 아니라 가장 첨예한 대중문화 시스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차우진/ 웹진 웨이브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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