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노동자·영화배우·사진모델·사회주의자·혁명가…'티나 모도티'

20세기 최고 여성 사진가의 혁명적 삶과 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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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사진가 티나 모도티(Tina Modotti, 1896∼1942)의 평전 '티나 모도티'(마거릿 훅스 지음, 해냄, 2만7000원)는 예술가이자 열렬한 혁명가였던 티나 모도티의 인생과 예술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이탈리아 북부 우다인에서 태어난 티나는 열일곱살이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간다. 티나가 미국에 정착한 지 2년째인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파나마-태평양 엑스포는 그의 삶을 바꿔놓는 계기가 된다. 티나는 그곳에서 시인이자 화가인 로보를 만나 결혼을 하고 당시 열린 전시회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과 알게 된다.

다수의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면서 LA의 예술가 집단과 교류를 하다 전설적인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과 연인관계가 된다. 자유연애주의자였던 그는 남편 로보가 있었지만 웨스턴과의 연인관계도 유지했으며 수많은 남성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지병으로 숨지고 웨스턴과 함께 멕시코로 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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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 모도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와 '칼라릴리'를 찍은 사진작가이자 '망치와 낫' '손'연작을 찍으며 20세기 혁명의 대열에 선 활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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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는 여성의 손(1927). 예술적 미학과 혁명의 선전성을 동시에 지닌 '손'연작은 여성, 노동자, 혁명가들의 손을 통해 그들의 삶과 사회상을 압축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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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릴리(1925). 티나 모도티의 예술적 미학이 절정에 이른 작품.

티나의 인생은 멕시코에서 새롭게 시작된 거나 다름없는데 웨스턴의 작업에 조수와 모델로 동참하면서 사진가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갔으며 멕시코의 위대한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 쿠바의 망명혁명가 안토니오 멜라 등 예술가와 혁명가들과 교류하며 사회적 변혁의 요구를 사진에 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티나는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환경 속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예술적 미학과 혁명의 선전성을 동시에 지닌 그의 수작 '릴리''손'연작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또 멕시코의 예술가와 작가들이 공동으로 제작했던'멕시코 민습'(1925∼37, 스페인어와 영어로 발간된 계간지)의 편집인을 맡아 멕시코인들의 모습, 고유민속 등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이 작품들 중 마른 옥수수, 탄약대, 낫으로 구성된 정물 사진은 그의 혁명적 사고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스페인 내전 때 반파시스트 연대활동을 한 티나는 내전이 끝난 뒤 다시 사진을 시작하기 위해 멕시코로 돌아온다. 사진작업을 하기에는 강렬한 태양의 나라 멕시코 만큼 좋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진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백 명이 참여했으며 그의 관은 망치와 낫이 그려진 깃발에 둘러싸여 땅 속으로 들어갔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그에 관해 쓴 시를 낭송했으며 푸에블라의 직물 노동자들은 새로운 직기에 '티나'라는 세례명을 붙여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티나의 사진작품들은 당시 사진의 국제적 흐름이었던 형식주의를 토대로 그가 추구했던 사회주의의 이상을 간결하고 아름답게 표현해내 근래에 이르러 미학적으로 가치를 높게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 역시 생전에는 다른 여성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먼저 사진작가보다는 매력적인 여배우의 이미지가 강했고 사진의 무대라 할 수 있는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멕시코에서 활동했다는 점과 활발한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예술가라기보다는 혁명가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진의 대가인 에드워드 웨스턴의 명성에 가려 그의 아름다운 연인 또는 조수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기 때문이다.

한정림 기자u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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