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사또 물먹인 춘향이 기개서 공창제 논의로?

성을 사고 파는 행위는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금지사항이었다. 춘향이의 고난이 말해주듯 기생이 순순히 성적 제공을 하지 않으면 조급해진 양반남성들은 곤장을 친다, 옥에 가둔다 법석을 떨었지만 이는 점잖은 유교사회의 체면을 떨어뜨리는 추태일 터, 양반이 기생과 잠자리를 하다 걸리면 곤장을 맞는 쪽은 오히려 양반이었다. 이리하여 한반도 주민들은 성을 사고 파는 일에 심히 저어하는 심성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들이 노골적으로 성을 거래하는 현장을 보고 듣는 '사건'을 겪은 것은 1894년 청일전쟁을 치르면서부터였다. 이때 일본군대를 따라 성매매 업자와 여성들도 한반도에 들어왔는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그 숫자 또한 계속해서 늘어났던 것이다. 그 와중에 군인들이 성병에 걸려 군사력에 타격을 입게 될까 겁이 난 일본은 서둘러 유곽을 설치하고 성매매업을 허가하는 정책을 폈다. 명분은 풍기단속과 성병예방. 성매매 여성을 격리하여 관리함으로써 양가여성들을 보호하는 한편 성매매 여성들에게 성병검사를 시행하여 위생적인 성거래 정착에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공창제 실시의 또 다른 목적, 곧 업주에게 세금을 걷어 '부국강병'에 보탠다든가, 남성들에게 성욕 배출의 '자유'를 허함으로써 군국주의 통제사회의 억압을 보상해 준다든가 하는 이유들은 그다지 언급 사항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공식적으로 성매매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한반도의 오래된 원칙은 성찰될 기회도 없이 무너지고 만다. 한국인들은 여성의 성이 합법적인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 '발견'은 별다른 자원 없이 빈곤에 허덕이던 이들에게 상당한 유혹으로 다가왔다. 전차금(前借金)을 받고 딸이나 아내를 유곽에 파는 가부장이 생겨났고 별다른 자본 없이 영업을 시작하는 성매매 업자들이 생겼으며 인신매매단이 성행했다.

설비 미비로 유곽영업을 허가받지 못한 업자들은 그대로 사창 영업을 했다. 공창 지역 주변에는 사창 또한 성행하기 마련이었으며 좀더 싼 값으로 성을 사려는 빈곤층 남성들은 사창가로 몰려들었다. 성매매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성병검사는 그다지 예방에 효과도 없었다. 성병에 걸린 공창여성들은 '산업재해' 보상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전업'을 할 수 있었을까? 영업금지를 당한 이들이 굶지 않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사창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성을 사고 파는 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을 파는 여성에 대해 여전히 저어하는 심성을 간직한 조선인들이 성매매를 직업의 하나로 보는 쿨한 태도를 갖기란 무리였다.

공창과 함께 사창 또한 번성하고 성병은 깊어갔다. 누구나 조선의 성문화가 타락한 것을 개탄하는 가운데 '성욕을 참을 수 없는' 남성들은 끊임없이 유곽을 찾아갔다. 성욕을 참고 있는 남성들도 '남자의 성욕은 참을 수 없다'고 믿으며 그들을 연민했다. 그 사이 성문화 타락의 탓은 성매매 여성에게 돌려졌다. 이 모두가 공창제, 곧 국가가 남성들에게 남성으로서 성욕만은 참지 말라고 공인해 준 제도 아래서 펼쳐진 풍경이었다.

박정애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부설 전쟁과여성인권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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