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노벨문학상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문제작 '피아노 치는 여자' 다시 읽기

비인도적 권력체제, 인간잔학성에 대한

비판과 언어적 열정이 수상이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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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리데 옐리네크는 '피아노 치는 여자'(이병애 역/문학동네/1996)가 바로 자신의 아픔이며 어린 시절의 치부와 작별을 고하는 의미로 이 작품을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작가 자신에게는 잊고 싶은 아픔의 흔적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다른 작품들이 언어적으로 난해해 읽기 어려운데 비해 이 작품은 선명한 플롯을 갖고 있어 번역자나 독자가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다. 옐리네크의 자전적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에는 '비정상'적인 관계와 상황이 연속된다.

부친 부재로 비정상 모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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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하네케 감독에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안겨준 영화 '피아니스트'. 옐리네크의 자전적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를 영화화했다.

실제로 유명한 과학자였던 옐리네크의 아버지는 정신병을 앓았고 그녀 자신도 정신병에 걸릴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다는 고백이 반영되듯 작품 속 주인공, 에리카의 아버지 역시 정신병 환자로 어머니와 푸줏간 남자의 강제로 정신병원에 갇힌다. 그러므로 에리카의 가정에는 남자의 존재는 제거된 채 어머니와 딸, 둘만이 남게 되고 어머니는 딸인 에리카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기대하며 결여된 '남성적 팔루스(남근)'의 대역을 요구한다. 에리카는 이성에 대한 동경과 예쁜 의상, 장신구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호기심을 어머니에 의해 저지받자 자해, 관음증, 도벽과 성도착증의 모습을 보인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확인시키는 사실은 인간을 억압하는 권력관계는 단순히 남녀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사이에서도 또는 모든 인간들 사이에서 존재하며 결국 삶의 형태란 처절한 '파워 게임'이라는 사실이다.

'거세된 여성'으로서의 분노

에리카는 어머니의 지배와 정신적 폭력에서 벗어나는 시도로 몰래 자신의 방에서 아버지가 쓰던 면도칼로 자신의 몸을 자해한다. 아버지의 면도칼이 상징하는 '남성적 팔루스'의 역할, 즉 지배자의 역할을 시행함으로써 남성적이고 사디즘적인 것과, 다른 한편으론 자해를 하고 고통을 당하는 피지배자로 마조히즘적인 희열을 느끼는 상반된 역할을 담당하는 두 가지의 이중적 모습을 갖게 된다.

그의 마조히즘적 성향은 학교 레슨이 끝난 뒤 남자들만이 가는 홍등가로 가 피프쇼(peep show)를 관람하는데서 극대화된다. 이를 통해 자신은 남성이 될 수 없고 단지 '거세된 여성'이라는 점을 깨닫고 분노한다.

제자와의 병적 관계 속에 사랑 상실

제자 클래머와의 관계에서도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두 가지 측면을 재연한다. 하나는 클래머라는 남성을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게 함으로써 남성우위의 기존의 위치를 전도하며 지배적이 되며, 다른 한편 그에게 자신을 물로 적신 질겨진 두꺼운 밧줄로 묶어서 구타하고 학대하며 유린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에리카는 마조히즘적 학대를 자신에게 가하는 것이다. 클래머가 이 명령을 이행할 수 없음을 간청하는데도 자신의 명령을 이행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학대를 시행하는 사디즘적 심리가 노출된다. 클래머는 분노 끝에 에리카의 말대로 그녀를 처참하게 학대하고 유린한다.

에리카는 자신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학대당하고 유린당한 자신의 육체와 파괴된 사랑에 절망감을 느낀다. 그녀는 결국 자신을 성적불구로 만든 권력의 수행자인 어머니의 집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다.

비관적 염세적 페미니스트

주인공 에리카가 결국 클래머의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었고, 사랑이 파경한 뒤에 칼로 자신을 자해하며 갈 곳이란 그래도 자기의 권력수행자인 어머니의 집이라는 결론이 독자들에게 쓸쓸하고 우울한 후감을 남긴다. 작가가 왜 에리카를 권력 횡포의 원천인 어머니에게 다시 돌아가게 하는지 불만스럽다.

알렉산더 폰 보어만은 여성해방에 대한 옐리네크의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생각을 '위로가 없는 변증법'이라고 설명한다. 여성이 남성 본위적인 권력관계에서 성적인 희생자가 되고 있음을 고발하면서도 그에 대한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비관적 염세적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옐리네크의 글쓰기의 공격 타깃은 단순히 남성중심적 성적 권력체계에만 도전하려는 페미니스트의 경계를 초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의 권력관계에서 파생되는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지배와 종속관계, 독재자들이 국민을 세뇌하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국가주의도 옐리네크의 공격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부당하고 비인도적인 권력체제와 정치적 이데올로기,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들의 잔학성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사회 참여적인 작가정신과 이를 표현하는 대단한 용기와 언어적 열정이 그에게 2004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여하게 된 주요한 근거라고 생각된다.

이병애 이화여대 명예교수

도발적 글쓰기, 노골적 성 묘사로 기성권위에 도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누구?

“누군가 운명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남성이고, 누군가 운명을 부여받는다면 그것은 여성이다”

“여성은 아픔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남성의 폭력과 여성의 아픔은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의 교집합이자 합집합이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엘프리데 옐리네크(58)는 영화 '피아니스트'(감독 미카엘 하네케)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급진 페미니스트 작가다. 옐리네크는 1946년 오스트리아 남부 슈타이어마르크주 뮈르츠추슐락에서 태어났고 빈에서 성장해 지금은 빈과 뮌헨을 오가며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조국인 오스트리아의 사회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가해해오고 있어 조국보다는 타국에서 더 인정받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강권으로 피아노를 전공한 옐리네크는 대학원 졸업 후 새롭게 독문학과 예술사, 연극학을 전공하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첫 작품인 '우리는 미끼새들이다'를 비롯해 '연인들' '내쫓긴 자들' '욕망' '질병 혹은 현대의 여성들'과 같은 문제작을 연달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욕망'은 외설시비에 휘말리기까지 했는데 옐리네크는 “여성을 비하하는 남성 포르노에 대항하고자 의도적으로 쓴 안티포르노”라고 대응하기도 했다.

69년에는 23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 청년문화상을 받았고 86년에는 독일에서 하인리히 뵐 문학상을 수상, 조국보다는 독일에서 인정받아 현대 독일문학의 대표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스웨덴 한림원이 “소설 등의 작품을 통해 비범한 언어적 열정으로 사회의 진부한 사상과 행동, 그것에 복종하는 권력의 불합리성을 잘 보여줬다”고 노벨상 선정이유를 밝혔듯이 옐리네크의 작품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경제 비판을 중심으로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글쓰기와 노골적인 성묘사로 기성권위에 도전해 왔다.

특히 옐리네크는 여성이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 사회의 희생물이라는 70년대 여성운동가들의 생각과 달리 여성 자신들의 우매함과 천박함이 권위주의적 가부장적 사회의 지속적인 존립을 강화시킨다고 주장해 여성운동가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우리나라에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원작인 자전적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문학동네)와 '독일현대희곡선'(성균관대 출판부)에 실린 희곡 '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 일어난 일 또는 사회의 지주'가 나와 있다.

한정림 기자u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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