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꼬부랑 할머니'라고 불릴 만큼 심하게 허리가 굽은 어르신들을 거의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동네에서 그런 분을 심심찮게 뵈었던 것 같다. 척추 신경이 압박을 받는 척추간 협착증이나 골다공증이 '꼬부랑 할머니'를 만드는 주범이라고 하는데, 완전히 기역자로 굽은 허리에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으시는 그 할머니를 만난 것은 며칠 전이었다.
1923년 생, 올해 여든 둘. 함경남도 고원군에서 태어나신 양춘옥 할머니가 중매로 시집을 가서 보니 남편은 몹쓸 노름꾼이었다. 시집갈 때 마련해 간 옷가지마저 내다 팔아서 노름으로 날리는 위인과 살아봤자 고생길이 훤하다는 생각에 3년이 채 되기 전에 미련 없이 떠났다. 친정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함흥제사(製絲)공장에 여공으로 들어가 8·15 광복 때까지 고된 노동을 했다.
8·15 광복에서 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기에 어떻게 혈혈단신 남쪽으로 오셨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피란지인 부산 영도에서는 재봉틀로 구호품 의류를 수선해 자갈치시장에 내다 팔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옷 장사를 했다. 나중에는 포목상을 크게 하면서 서울역 뒤편 청파동에 자그마한 집도 마련했는데, 그만 남대문시장에 큰불이 나면서 장사 밑천을 모두 잃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그 후 어느 재래시장 골목에 좌판을 벌여 놓고 각종 젓갈류와 밑반찬을 떼어다 파는 장사를 하며 무거운 반찬 함지를 머리에 이고 다니다 보니 허리에 무리가 갔고, 거기다가 눈길에 몇 번 넘어진 것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결국 허리가 완전히 망가진 거라고 하셨다.
몇 년 전 장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그 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생활하면서, 공원에 나가 앉아있기도 하고 노인들에게 무료로 침을 놔주는 곳에 가끔 간다고 하셨다. 부양해 줄 자식 하나 없지만 열 평 남짓한 다 쓰러져 가는 집이 할머니 명의로 돼있어, 무료 양로원은 꿈도 못 꾸고 이제 더 나이 들고 몸이 나빠져 자리보전이라도 하게 되면 꼼짝없이 굶게 될 거라 말씀하시는 할머니. 글을 읽지 못 하는 할머니는 교회에서 받아온 설교 테이프 듣는 게 낙이라며 씩 웃으셨다.
우리나라의 노인 인구를 나눠 보면 8.3% 정도가 정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분들이고, 약 50%는 동네 경로당을 출입하시는 분들, 그리고 30만 명 정도는 노인복지관에서 활동하시는 것으로 보고 있고, 그 외에 골프나 등산, 바둑을 즐기는 분들을 따로 떼어놓고 나면 나머지는 집이나 보호시설에 있는 노인분들이다. 양춘옥 할머니는 맨 마지막 구분에 해당되는 셈이다.
의지할 곳도 기댈 사람도 없지만 단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 한 채 있는 바람에 아무런 보호도 혜택도 받지 못하는 할머니. 이날 이때까지 혼자 살아와 특별히 쓸쓸할 것도 외로울 것도 없다고 하시는 할머니. 할머니의 굽은 허리 위에는 이 땅에서 남편 없이, 자식 없이, 가족 없이 홀로 살아내야 했던 한 여성의 80년 삶이 무겁게 얹혀있었다. 양춘옥 할머니의 기역자 굽은 허리가 내내 가슴에 남아 '너는 도대체 누굴 위해 노인복지를 하고 있는가'묻고 또 묻고있다.
유경/
사회복지사,
어르신사랑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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