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프로젝트’ 3탄 음악극 ‘백인당(百人堂) 태영’
6월18일까지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다룬 음악극 ‘백인당(百人堂) 태영’의 한 장면. 이태영 변호사 역을 맡은 백은혜 배우. ⓒ우란문화재단 제공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다룬 음악극 ‘백인당(百人堂) 태영’의 한 장면. 이태영 변호사 역을 맡은 백은혜 배우. ⓒ우란문화재단 제공

“법이 사람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니라 여자들을 때려잡는 몽둥이니까.” 서울대 1호 여학생, 대한민국 1호 여성 변호사, 이태영(1914~1998)은 여성들과 손잡고 싸움을 시작한다. 그리고 수천년 묵은 차별의 벽을 부쉈다. 이태영이 없었다면 2005년 ‘호주제 폐지’도 없었다. 

그의 삶이 ‘여성 2인극’이 됐다. 우란문화재단과 장우성 연출·이선영 작곡가·박소영 연출가가 함께한 ‘목소리 프로젝트’ 3탄 ‘백인당(百人堂) 태영’이다. 평생 여성을 도운 여성, 독립·인권·민주화 운동가, 2017년 구글이 인정한 ‘13인의 여성 개척자’ 중 한 명. 그러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여성 영웅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음악과 재기발랄한 연기로 전한다.

불과 수십 년 전 일이지만 ‘페미니즘 백래시’가 거센 2023년의 풍경과 겹쳐 보여 한숨과 탄식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한국은 11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유리천장지수 ‘꼴찌’고, 대안 없는 여성가족부 폐지론이 여전히 공론장을 맴돈다. 남성의 영역에 당당히 입성하고, ‘여성도 똑같은 사람’이라며 싸웠던 선배 여성의 이야기가 지금 새로운 영감과 용기를 주는 이유다.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다룬 음악극 ‘백인당(百人堂) 태영’의 한 장면. 이태영 변호사 역을 맡은 백은혜 배우. ⓒ우란문화재단 제공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다룬 음악극 ‘백인당(百人堂) 태영’의 한 장면. 이태영 변호사 역을 맡은 백은혜 배우. ⓒ우란문화재단 제공

두 여성만이 무대에 선다. 주인공 ‘태영’ 역은 깊이 있는 작품 해석으로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이봉련 배우, ‘목소리 프로젝트’ 3편 모두에 출연하는 백은혜 배우가 맡는다. 주변인들과 태영을 알고 싶은 오늘의 목소리인 ‘서술자’는 이현진, 이예지 배우가 맡는다.

특히 ‘믿고 보는 배우’ 이봉련의 연기는 놓치기 아깝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영화 ‘82년생 김지영’,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등 사회적 약자를 조명한 작품에서 활약한 배우다. 웅변대회에 나가 “아들을 낳으면 온 동네가 기뻐하고 딸을 낳으면 엄마들이 웁니다. 이건 아니잖아!”라고 외치는 맹랑한 일곱 살 소녀 연기를 기막히게 해낸다. 네 아이를 낳고 다시 공부를 시작해 서울대 법대에 합격해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30대의 ‘주부학생’, 무료 법률상담소를 차려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여성들을 돕고 가족법 개정 운동을 펼치는 중노년의 변호사까지 모두 소화한다.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다룬 음악극 ‘백인당(百人堂) 태영’의 한 장면. (왼쪽부터) 이태영 변호사 역을 맡은 이봉련 배우, 그 주변인들과 ‘서술자’로 분한 이예지 배우. ⓒ우란문화재단 제공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다룬 음악극 ‘백인당(百人堂) 태영’의 한 장면. (왼쪽부터) 이태영 변호사 역을 맡은 이봉련 배우, 그 주변인들과 ‘서술자’로 분한 이예지 배우. ⓒ우란문화재단 제공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다룬 음악극 ‘백인당(百人堂) 태영’의 한 장면. (우측부터) 이태영 변호사 역을 맡은 백은혜 배우, 그 주변인들과 ‘서술자’로 분한 이현진 배우. ⓒ우란문화재단 제공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다룬 음악극 ‘백인당(百人堂) 태영’의 한 장면. (우측부터) 이태영 변호사 역을 맡은 백은혜 배우, 그 주변인들과 ‘서술자’로 분한 이현진 배우. ⓒ우란문화재단 제공

뮤지컬 ‘쇼맨’, ‘엘리펀트 송’ 등에서 활약한 이현진 배우의 존재감도 압도적이다. ‘아들딸 가리지 않고 공부 잘하는 아이를 뒷바라지하겠다’며 태영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모친과 큰오빠, 이화여전 시절 태영에게 법률 공부를 가르친 정광현 교수 등 태영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은 물론, 가족법 개정 운동에 반대하는 유림 세력을 비롯해 수많은 성차별과 여성혐오의 목소리까지 밉살스러울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재현한다. 

화려한 세트 없이 분필 칠판, 끈, 조명 등 최소한의 장치로 속도감 있게 무대를 전환한다. 역사와 법률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쉽고 친절한 극이다. 아름다운 멜로디로 마음을 울리는 음악의 힘도 크다. 중간휴식 없는 100분짜리 공연이지만 지루하지 않다.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다룬 음악극 ‘백인당(百人堂) 태영’의 한 장면. (왼쪽부터) 이태영 변호사 역을 맡은 이봉련 배우, 그 주변인들과 ‘서술자’로 분한 이예지 배우. ⓒ우란문화재단 제공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다룬 음악극 ‘백인당(百人堂) 태영’의 한 장면. (왼쪽부터) 이태영 변호사 역을 맡은 이봉련 배우, 그 주변인들과 ‘서술자’로 분한 이예지 배우. ⓒ우란문화재단 제공

배우들이 반복해서 던지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명쾌하다. “하고 싶은 말은 참지 말고 끝까지!” “전통의 노예가 아닌 역사의 창조자가 되자!” “한 글자, 한 걸음, 세상을 바꿀 거야/한 글자, 한 걸음, 우리는 해낼 거야...” 지난 20일 공연이 끝나자 객석을 메운 2030 여성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누군가에게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은 흥미진진한 역사를 배우는 시간일 것이고, 각자의 생활전선에서 마주하는 차별에 맞설 용기를 얻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역사를 쓴 여성들 곁에는 그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빛을 볼 수 있게 돕는, 눈 밝고 지혜로운 남성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태영 변호사의 든든한 지원자이자 동반자가 돼 준 남편 정일형 박사의 대사를 오래 곱씹었다. “제가 바라는 건 ‘두 번째 인형’이 아니라 함께 걸어갈 ‘첫 번째 사람’입니다.” “여보, 당신이 하고 싶어 했던 법률공부를 하시오. 결초보은하겠소.” 오는 6월18일까지 서울 성동구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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