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중인 양민영 저자. 사진=본인제공
달리기 중인 양민영 저자. 사진=본인제공

숨이 가쁘고 그만 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6킬로미터까지만 달리면 기분 좋게 레이스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에게 6킬로미터와 11.25킬로미터, 두 개의 코스 중에 후자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회를 기획한 나부터도 긴 코스를 달리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달릴 것인가?

코로나 확산이 한창이던 2021년에 각자 달리고 인증하는 비대면 러닝 대회가 유행이었다. 기존의 유명 마라톤 대회도 비대면으로 전환해서 진행됐고 기발한 콘셉트의, 별의별 레이스가 다 등장했다. 그 대열에 여성주의를 내세운 대회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UN이 지정한 세계여성폭력추방의 날을 기념하는 ‘오렌지런’을 기획했다.

대회 참가자들은 두 가지 코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6킬로미터는 세계적으로 한 시간마다 6명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에 의해서 살해되는 끔찍한 현실에 알리기 위한 코스였고 11.25킬로미터는 11월 25일을 기념하는 코스였다.

결국 후자를 선택했지만 문제는 달리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유는 막연하게 ‘폐활량이 좋지 않아서’, ‘장거리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는데 한 독자가 선물한 「달리기와 존재하기」를 읽고 명확하게 깨달았다.

이 책의 서두에는 윌리엄 쉘든 박사가 연구한 체형심리학을 인용하며 ‘우리 몸의 기능은 구조에 따르며 체형과 성격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재미있는 문장이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동양의 관상과도 비슷한 체형심리학에서 장거리 달리기에 가장 적합한 인체 유형은, 동물의 이미지에 비유하면 여우라고 한다.

여우처럼 예민하고 군살이 없고 빠르고 비상한 머리와 지구력과 엄청난 속력을 가진, 다루기 힘든 사람. 근육이 덜 발달했고 적극성은 부족해서 아무 일도 없다면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 그들이 타고난 러너라는 거다.

이 대목을 읽자마자 도심의 러닝 코스나 트레일에서 수도 없이 마주쳤던 여우들이 떠올랐다. 애초에 ‘지구력’의 동의어는 ‘가벼움’이 아니던가. 이 가벼운 사람들은 초경량이자 초고가인 첨단 장비로 무장하고 마음만 먹으면 영원히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초인적인 기록을 세우곤 했다. 항상 멀리 앞서가는 여우의 등을 보며 따라갔던 나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근육이 발달하고 싸우기에 적합한 늑대가 아닐까 짐작했다.

그러나 내가 여우인지, 늑대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나도 다른 참가자들처럼 어서 달리고 기록을 공개해야 한다는 거였다. 주말 아침을 디데이로 점찍었고 방심했다가는 종일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한강 공원까지 체력을 보존하면서 (얼렁뚱땅 다음으로 미루기 전에) 단숨에 가야 하므로 택시에 몸을 싣고 가까스로 8시 정각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총 11.25킬로미터를 혼자 달리자니 마지막 3킬로미터는 진저리가 쳐지도록 달리기 싫었다. 원래는 달리면서 여성대상폭력의 심각성을 재고하고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라피엘 트루히요에 맞서서 저항운동을 했던 미라발(Mirabal) 세 자매(이들의 죽음으로 세계여성폭력추방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를 기리려고 했으나 머릿속엔 온통 그만 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고통을 인내하기 싫어서인지도 모른다. 앞서 소개한 「달리기와 존재하기」의 저자 조지 쉬언이 말하길, 진정한 러너는 ‘고통과 피로와 아픔을 견디고 스트레스에 스트레스로 맞서고 삶에서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버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들은 운동보다 정신 수양에 가까운 달리기를 통해서 지치지도 않고 노력하는 청교도적인 의미의 자유인이 된다.

달리기에 가장 좋은 계절인 5월이다. 비장하게 레이스를 준비하는 이들도 있고 반쯤은 강요에 떠밀려서 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연이야 어떻든 일단 출발선에 서면 고통을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단 하나, 달리면서 진짜 당신을 발견하게 되는 건 확실하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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