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널즈’ 없는 학회를 바란다
‘매널즈’ 없는 학회를 바란다
  • 문성실 미생물학 박사
  • 승인 2023.03.24 16:33
  • 수정 2023-03-29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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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과학]
‘발표·토론자 모두 남성’ 관행
해외선 다양성·평등 촉진 시도 이어져
리더들이 적극 참여해야 바뀌어

‘매널즈’(manels)라는 말이 있다. 남성을 의미하는 메일(Male)이란 말과 패널(Panel)의 조합으로, 남성으로만 구성된 패널(All-Male Panels)을 의미한다. 비슷한 의미로 맨퍼런스(manferences), 힘포지움(himposiums)이라는 신조어도 있다. 학회나 토론회 무대가 남성으로만 이루어진 ‘매널즈’를 지금도 국내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전 미국 국립보건원 (NIH) 원장인 프란시스 콜린스 박사는 원장이던 2019년 생물의학 연구의 문화와 환경을 다양성·포용성 관점으로 변화시키자는 취지에서 토론회 및 고위급 회의에 여성의 자리를 늘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더불어 NIH 소속 과학자나 직원이 참석하는 자리에 여성 패널이 없을 경우 참석을 거부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나섰다. “평등에 대한 ‘립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리더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헌신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그의 선언은 과학계뿐만 아닌 사회학, 비즈니스, 공학 분야로 영향력을 넓혀 나갔으며, 2019년 필자가 참석한 한 학회의 좌장으로 나선 NIH 연구자는 ‘다행히 여성 패널 덕에 제가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는 발언을 한 적 있다.

지난 14일~16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로타바이러스학회(14th International Rotavirus Symposium) 현장. 패널들의 다양한 성비, 얼굴색, 옷차림이 눈에 띈다. ⓒ문성실 박사 제공
지난 14일~16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로타바이러스학회(14th International Rotavirus Symposium) 현장. 패널들의 다양한 성비, 얼굴색, 옷차림이 눈에 띈다. ⓒ문성실 박사 제공

지난주 필자는 코로나로 두 번이나 연기됐던 로타바이러스학회(14th International Rotavirus Symposium)에 참석했다. 심각한 설사 질환을 일으키는 로타바이러스는 저소득국가에서 5세 이하 아이들이 연간 20만 명씩 사망하는 원인이다. 이 로타바이러스의 역학, 공중보건, 백신 및 바이러스 기초 연구를 하는 이들이 인도네시아에 모였다.

사흘간 12개 세션으로 이루어진 학회는 모든 세션의 좌장이 여성 한 명, 남성 한 명으로 이뤄졌다. 모든 세션에서 발표하는 패널들의 성비는 어느 한쪽도 30% 이하로 치우치지 않도록 구성됐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패널들의 다양한 얼굴색과 다채로운 옷차림, 그리고 학계의 저명한 원로와 나란히 패널석에 앉은 대학원생, 박사 후 연구원들의 모습이었다.

학회 후 사석에서 우연히 조직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오랜만에 열린 학회여서 배울 것도 많고 새로운 네트워크도 쌓을 수 있었지만, 패널의 “다양성”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조직위원은 첫 번째로 공들인 부분은 장소, 두 번째는 패널이었다고 답했다. 즉, 저소득 국가에서 심각한 질병에 대해 다루는 만큼 현지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참여할 수 있는 지역에서 학회를 유치해 접근성을 높였기에, 첫날 내내 ‘질병이 현실’인 인도네시아와 주변국 연구자들의 연구와 노력을 들을 수 있었다. 또 각 세션의 다양한 연구 분야에서 중견 연구자들이 저소득 국가 패널과 젊은 연구자들을 위해 자리를 선뜻 내놓았기에 풍성한 학회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이 학회에 참석한 지난 15년간 단 한 번도 ‘매널즈’를 본 적 없다. 다양성을 위한 학계 원로들과 조직위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평등에 대한 리더들의 헌신’이 어떻게 학계를 변화시키며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간신히 매널즈를 피하기 위해 홍일점으로 끼워 넣은 패널리스트, 과학 단체 행사에 눈 크게 뜨고 찾아봐야 보이는 여성 대표들, 저출산 문제를 다루는 신문의 남성 패널로만 구성된 특집기사, 저출산의 당사자인 20~30대 남성은 제외된 TV 토론은 젠더와 세대의 문제를 평면적으로 대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준다. 다양성은 결코 ‘립서비스’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문성실 미생물학 박사 ⓒ문성실 박사 제공
문성실 미생물학 박사 ⓒ문성실 박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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