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2023 여성노동자대회에 참가했다.  ⓒ정보라 작가 제공
지난 3월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2023 여성노동자대회에 참가했다. ⓒ정보라 작가 제공

2월27일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개강맞이 결의대회가, 3월4일 여성노동자대회가 열렸다. 나는 여성 비정규직의 관점에서 참가했다. 여성노동자대회에서는 어쩌다 보니까 발언도 했다. 발언자 6명 중 내가 다섯 번째였는데, 앞뒤 발언한 동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 분야에서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경험은 굉장히 비슷한 측면이 많다고 느꼈다.

대학 어문계와 예체능계 등 학교 밖에 안정적인 일자리가 많지 않은 분야일수록 교수가 강사와 대학원생의 미래를 결정하는 지나친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분야일수록 비정규직 강사에 대한 차별, 대학원생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 고용이 불안정한 분야일수록 여성이 남성보다 많다. 대학 예술 계열이 대표적이다. 교수들은 남자고 강사는 여자다. 여자 강사들은 계약만료 후 해고돼 학교에서 사라지는데 남자 강사들은 교수님이 돼 떠난다. 나는 이런 모습들을 실제로 봤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이런저런 남자 교수들이 나를 불러서 밥을 사주는 일도 있었다. 자기하고 같이 러시아에 놀러 가자는 남자 교수도 있었고, 이유 없이 간헐적으로 연락해서 아무 맥락 없이 같이 차를 마시자는 남자 교수도 있었다. 다들 유부남이다. 다들 나에게 강의 자리도 교수 자리도 주지 않았다. 교수가 만나자고 하면 강사는 어쨌든 단칼에 거부할 수 없다. 강의를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있으니 이유 없이 만나자는 남자 교수한테 왜 내가 추석 연휴에 당신 혼자 있는 연구실에 찾아가야 하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다. 선배 언니는 그래서 추석에 남자 교수 연구실에 가지 않겠다고 거절했다가 강의를 잘렸다. 그 남자 교수는 이전에 학생을 성추행했다는 혐의가 제기돼 학교를 들썩이게 했던 사람이었다.

내가 속했던 분야는 학교 바깥에서 취업이 쉽지 않고 대학들이 교수 채용도 하지 않는다. 정규직 교수 한 명 연봉으로 비정규직 강사 7명~10명 정도를 쓸 수 있다. 박사학위 소지 여성 강사들은 일반 회사에 신입으로 취업하기에는 나이도 너무 많고 학력도 너무 높고 그에 비해 취업 경험은 적거나 없다. 그러니까 이미 박사학위를 받고 30대에 접어든 여성 강사들이 학교 바깥에서 새롭게 다른 커리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 교육을 받으면 인생의 선택지가 넓어져야 하는데, 한국에서 교육받은 여성은 연령에 따라 인생의 선택지가 점점 좁아진다. 그러나 2017년도 보건사회연구원의 그 유명한 ‘여성 눈높이 하향 평준화’ 저출산 대책을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는 여성이 교육받든 안 받았든 애초에 여성의 삶의 선택지를 늘려줄 생각이 별로 없는 게 확실하다.

2월27일 세종시 교육부 앞에서 열린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개강맞이 결의대회에도 참가했다.  ⓒ정보라 작가 제공
2월27일 세종시 교육부 앞에서 열린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개강맞이 결의대회에도 참가했다. ⓒ정보라 작가 제공

이런 현실을 “노오오력”해서 “압도적인 연구실적”으로 “극뽀옥”하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여성노동자대회에서 다른 비정규직 여성 동지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장시간 노동에 힘들어하면 네가 근성이 없는 탓이라고, 처음 출근했는데 아무도 일을 가르쳐주지 않아서 어리둥절하면 네가 모자란 탓이라고, 고용주와 사측이 노동자에게 안전하게 효율적으로 노동할 환경을 제공해주지 않고 모든 문제를 노동자 본인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나도 연구 실적이 모자라서 교수로 임용할 수 없다는 선고(?)를 직접적으로 몇 번 들었다. 현직 교수도, 선배 강사도, 강사였다가 “극뽀옥”해서 교수가 된 선배도, 논문 실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마법의 열쇠인 양 말했다. 그런데 나는 교수임용 심사에서 실제로 연구 실적이 압도적인 후보자가 교수로 채용되는 일을 별로 목격한 적이 없다. 내가 연구 실적이 모자라서 탈락했다면 나보다 실적이 뛰어난 다른 사람이 채용됐어야 옳다. 그런데 아무도 채용되지 않았다. 임용 자체가 무산됐는데 학교나 학과 측에서 적절한 설명을 해준 적도 없다.

내게 연구 실적과 노력과 극복에 대해 조언한 사람들은 모두 현재 고등 교육 현장에 몸담은 교육자들이다. 현실이 불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마치 나라는 개인이 노력하면 차별적 구조를 내 의지로 언제든 넘어설 수 있는 듯 포장하는 것은 교육자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본인이 시간강사로 그 차별적인 구조를 오랫동안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 구조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내가 참았으니 너도 참으라고 충고하는 게 교육자의 태도인가? 차별적이고 착취적인 체제에 기생하며 스스로 교육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얘기를 하면서 나는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이야기했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대학사회 건설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외쳤다. 보신각 앞을 가득 메운 나의 선배, 나의 동지 여성 노동자들이 함성으로 답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서울시청광장으로 행진했다.

지난 3월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2023 여성노동자대회에 참가했다. 참가자들이 서울 도심을 행진하고 있다.  ⓒ정보라 작가 제공
지난 3월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2023 여성노동자대회에 참가했다. 참가자들이 서울 도심을 행진하고 있다. ⓒ정보라 작가 제공
2월27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린 고 변희수 하사 2주기 추모제에 참석했다. ⓒ정보라 작가 제공
2월27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린 고 변희수 하사 2주기 추모제에 참석했다. ⓒ정보라 작가 제공

나는 싸우는 여성을 사랑한다. 2월27일 세종시 교육부 앞에서 개강 결의대회를 마치고 서울로 달려와서 종로 보신각 앞에서 변희수 하사님 2주기 추모제에 참석했다. 나는 변희수 하사 덕분에, 변 하사와 함께 한국이 정말로 바뀔 줄 알았다. 내가 순진했던 것이겠지만 나는 한국이 성차별과 편견을 딛고 정신 차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변 하사는 지독한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운 강하고 위대한 여성이었고, 여러 사람에게 커다란 흔적을 남겼고, 너무 아깝게 먼저 갔다.

3월2일 성주 소성리와 김천 농소면에 갔을 때 소성리 부녀회 할머님들을 보면서 나는 또다시 싸우는 여성이 얼마나 위대한지 생각했다. 소성리 부녀회 동지들(이렇게 지칭하겠다, 최고 멋진 분들이므로)은 평생 살아온 땅을 지키는 소성리 사드대책위원회의 가장 뜨거운 힘이다. 그리고 소성리에서 가까운 구미시에 있는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의 든든한 뒷배(!)이기도 하다.

국방부가 2015년 사드 배치 이전에 열었어야 할 주민설명회를 어째서인지 2023년 3월2일에 열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평통사, 민주노총 금속노조와 경북지역본부 등 관련단체들이 모두 저지하려고 달려갔다. 오전엔 소성리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오후에는 김천 농소면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반대 기자회견을 했다.

3월2일 경북 성주군 소성리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열린 사드 환경영향평가 주민설명회 반대 기자회견 현장에도 참가했다.  ⓒ정보라 작가 제공
3월2일 경북 성주군 소성리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열린 사드 환경영향평가 주민설명회 반대 기자회견 현장에도 참가했다. ⓒ정보라 작가 제공

현지 주민들은 주민설명회를 진행할 주민대표가 누군지도 모르고 왜 갑자기 소성리에 사드가 이미 들어왔는데 8년 만에 주민설명회를 하겠다는 건지도 알 수 없으며 국방부가 전면적 파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분노했다. 국방부가 마음대로 “주민설명회 개최했다”, “주민들의 동의를 얻었다”고 기록을 남기고 ‘셀프 결재’해 버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소성리에서도 농소면에서도 주민들이 행정복지센터 2층 회의실 앞을 가로막았다. 투쟁하는 주민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고 그중에서도 평생을 성주와 김천 참외밭, 자두밭을 일구며 살아오신 여성 노인들이었다. “소성리에 평화를,” “사드배치 결사반대” 등의 손팻말을 익숙하게 들고, 방송사 카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민대표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무신 주민설명회를 이제 와서 한다 말이고!” 하고 일갈하시는 노년 여성 주민들을 보면서 나도 크면 저렇게 훌륭한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3월은 여성의 달이다. 여성들은 언제나 살고 일하고 배우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공감하며 생존하고 전진해 왔다. 각자의 자리에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오늘도 싸우는 여성 동지들에게 나의 끝없는 사랑을 바친다. 나는 여성의 달이든 아니든 4월에도 5월에도 그 뒤에도 계속 데모할 것이다.

세계적 권위 문학상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우리 사회 곳곳의 차별과 폭력에 대한 저항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월간데모’로 독자들을 만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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