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경 /

<뉴스위크>한국판 편집장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원은 속상하겠다. '친일'이라는 예상치 않은 암초에 걸려 잘 나가는 여권 내 당권파인 그가 졸지에 난파됐으니 말이다. 신 의원에게 아버지는 영웅이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아버지는 전쟁영웅”이라며 부친 신상묵 씨에 대한 칭송의 글을 잔뜩 올려놓은 뒤, 결론적으로 “선친의 기개를 이어받은 신기남은 해군 전투장교를 지원하여 거친 바다 위 전투함에서 나라를 지켰다”며 부자의 대를 이은 용맹함과 의로움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그런 아버지의 친일행적이 적나라하게 도마에 오르고 결국 이를 은폐하려 했던 자신은 도덕성 시비에 휘말려 당의장직을 내놓아야 했으니 얼마나 수치스럽고 속 쓰릴까. 바로 이 순간 신 의원은 미래를 위한 과거청산의 필요성을 강조한 노무현 대통령의 이번 8·15경축사를 듣고 뜨거운 박수를 보내던 그 마음에 아무런 동요가 없을지 궁금하다. 자신의 '미래'를 닫아버린 아버지의 '과거'와 그 과거를 고스란히 드러내게 만든 최근의 청산 움직임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갖게 됐을까.

세상이 너무 심란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은 나날이 '국익'과 '민족'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가고 있다. 최근 고구려사를 탈취하려는 중국의 움직임에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라는 중국의 21세기 원대한 야망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팍스 시니카는 중국에 의한, 중국을 위한, 중국의 평화, 즉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말한다.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해야 동북부 지방 주민의 애국심과 중화사상을 확실히 다져둘 수 있다는 취지의 동북공정도 팍스 시니카의 한 축이다. 여기서 억지주장인 고구려사 왜곡이 시작된다.

일본도 이번 8·15 종전기념일에 각료 3인과 여야 의원 58명이 집단으로 태평양 전쟁 도발의 전범들이 묻혀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나섰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단독 신사참배 만으로도 국제적인 여론의 비판을 받아온 터이고 보면 일본의 이런 모습은 일면 도발적으로까지 받아들여진다.

이미 오래 전부터 팍스 아메리카를 내세우며 세계의 경찰임을 자임해온 미국도 자국 이익 위주로 세계 질서를 재편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동시에 상영되고 있는 영화 '화씨 9·11'은 미국 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것도 결국은 자국의 이익이든, 특정 권력집단의 이권확보이든 간에 석유자원 확보를 위한 치밀한 전략이었음을 미국 내부 시각으로 고발하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우리는 노무현정부가 들어선 이래 극심한 국론분열 양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북송금특검, 불법대선자금수사, 이라크 파병, 대통령 탄핵심판, 행정수도 이전, 과거사 청산 등의 메가톤급 화두를 놓고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도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매도하고 불신하며 2년에 가까운 기간을 혼돈 속에서 보내왔다.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풍토에서 경제가 성장하고 안정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먹고살기 힘드니 분열과 불신은 더 심화된다.

신기남 의원이 열린우리당 당의장을 하든 말든 일반 국민은 관심이 없다. 국민이 우려하는 것은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벌어질 반목과 분열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신 의원이 당의장직을 내놓은 8월 19일 상임운영회의에서 과거사에 친일문제뿐만 아니라 '친북' '용공'까지 포함한 대폭적인 진상규명을 하자는 확대제안을 했다. 나라가 두 쪽이 나야 끝날 성싶은 분위기다.

과거사 청산작업이 진정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그간 이 일을 꾸준하게 추진해온 전문가 집단에 역할을 넘겨주고 정치권은 '국익'을 위해 국력을 총 집결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 국민은 이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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