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이는 운동기획력의 리더십-고은광순·이유명호씨

-“호폐 여세몰아 일상 차별문화 바꾸겠다”

한의사 선후배로 '호폐모' 최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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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폐모' 최일선 동지 고은광순(왼쪽)·이유명호씨.

여한의사회 선후배이자 여성활동가로 신명나게 여성운동을 벌여 온 고은광순(48)씨와 이유명호(50)씨. 1995년 약사분쟁을 계기로 알게 된 이들은 1998년 '호주제폐지를위한시민의모임'(이하 호폐모)을 발족하면서 본격적으로 호주제 폐지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4녀2남 중 넷째 딸로 태어나 대학시절 유신독재와 싸우다 재적당하고 뒤늦게 한의대에 입학한 고은광순씨는 1992년 개원한 한의원에서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여자 환자들을 보며 한국 사회의 가부장성이 뿌리깊고, 그 뿌리에 호주제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1997년 여성단체연합과 공동으로 '남녀성비 불균형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호주제 폐지를 위한 활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한 고은광순씨는 같은 시기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을 전개하며 호주제 폐지의 당위성을 알리고 대중화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부모성 함께 쓰기'운동은 부계(父系)와 부성(父性)으로 유지되는 가부장적 문화에 일침을 가하는 시도로 그가 '고은광순'으로 개명까지 하며 고수했던 부분이다. 또한 그는 2001년 300명 가까운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호주제 폐지 발의에 동참하도록 호소해 호주제 관련 법 개정에 적지 않은 힘을 보탰다.

고은광순씨가 글과 강의 등으로 호주제 폐지의 당위성에 대한 여론을 형성했다면 이유명호씨는 그를 뒤에서 후원하며 언론 홍보에 주력한 경우. 경희대 한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여한의사로서 자연스럽게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명호씨는 고은광순씨와 만나면서 더욱 활발하게 여성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이들이 '양면작전'이라 말하는 호주제 폐지 운동 과정은 두 사람이 속한 여한의사회에서 호주제 폐지 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두 사람이 사회 전반의 여성 문제 해결에 발벗고 나서 온 과정에 다름아니다. 이들은 여성장애인연합, 여성단체연합 등 여성NGO를 물밑에서 후원하고 여성축제, 여성문화 행사 등에서 유쾌한 모습으로 성차별적 문화를 전복하는 등 여성문제 해결에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특히 2003년 한국여성단체연합 호주제폐지운동본부와 호주제 폐지 관련 캠페인을 벌이며 호주제 폐지에 찬성입장을 표명한 의원들에게 일명 '남녀 평등 쌍화탕'이란 보약을 제공했던 이유명호씨는 여성의 몸과 건강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여성을 2등 인간으로 규정하는 호주제는 성매매, 성폭력 등 모든 여성문제의 뿌리가 된다”면서 “호주제가 폐지되면 이제 종교, 역사 등 문화를 바꾸는 데 관심을 가질 생각”이라고 말한다.

고은광순씨 역시 “제도가 바뀌어도 일상에 스며있는 고정적인 차별문화가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제사, 혈통 문제 등을 다루며 대중적인 문화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전한다.

이들이 관심 갖는 여성문제의 영역은 참으로 넓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이제 또 다른 여성문제의 현장에서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속한 '호폐모'는 호주제 폐지 이후 '호주제폐지를한시민의모임'으로 이름을 바꾸고 언론 모니터 활동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비전과 끈기의 리더십-곽배희 가정법률상담소 소장

-“가족법 개정은 여성 인간화 운동”

30여 년 '가법' 한우물 연내 '호폐' 결실 위해 의원 맨투맨 작업 총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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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법 개정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그 정점으로 전개되고 있는 호주제 폐지운동은 확실히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고, 그것도 시간에 비례해 변화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TV드라마 등 대중매체를 보면 확연하지 않은가. 방송이 상당히 보수적인데도 요즘 드라마들을 보면 비혼모, 이혼여성과 미혼남성의 결혼, 국제결혼 등 1980∼90년대만 해도 공감대가 거의 형성되지 않았을 소재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것도 여성정체성과 양성평등 의식을 어느 정도 깔고서. 간혹 어떤 드라마는 (여성권익 부분이 상대적으로 남성권익에 비해) 너무 나갔다 싶을 정도인데, 결국 현실에서 그렇게 될 소지가 높아 그런 극 설정이 가능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대학(이화여대 법학과) 졸업 후 3년 여 정도만 잠시 '딴 길'(기독교방송국 사회교양담당 프로듀서)을 걷다가 '사람 욕심이 하늘을 찌를 듯한' 스승 이태영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법) 초대 소장에게 이끌려 가족법 개정운동의 첫 발을 내딛게 된 곽배희 가법 소장. 27세의 팔팔한 나이에 '상담위원'으로 가법 일을 시작하게 된 곽 소장은, 그 첫 걸음이 이후 30여 년의 대장정의 시작이 될 줄은 사실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곽 소장은 결국 뒤늦게 공부를 시작, 2002년 모교에서 가족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렇기에 그는 가법 첫 근무일인 '1973년 5월 12일'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당시 그는 “사람은 자기능력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자신만만한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아들 한 명에 딸 다섯인, 스스로도 '여성왕국'이라 부르는 집안 환경이지만,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여성'으로서 차별을 당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법 일을 통해 이태영 박사와 “가족법 개정운동은 결국 여성의 인간화 운동”이란 이상을 굳게 공유하게 됐고, 이후 이 신념이 그가 호주제 폐지를 포함한 가족법 개정운동을 줄기차게 밀고 나가게 된 원동력이 됐다. 그는 동성동본 금혼규정 폐지에 이어 호주제 폐지가 운동의 핵심 중 핵심이라 믿고 있다. 호주제 폐지 후엔 '전략적'으로 부부재산제, 양육비 이행 등의 문제가 점진적으로 발전할 것이라 내다보고 있다.

그는 “호주제 때문에 21세기에 새롭게 정착돼야 할 가족정책, 가족구조가 진전을 볼 수 없다”며 “법 앞에서의 남녀평등에 대한 법학자로서의 이상 구현 욕망이 오랜 세월 호주제 폐지에 투신하게 한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호주제 폐지 이후 사회는 기초 가족관계가 평등을 이룸으로써 자연스럽게 민주화와 시민의식이 빠르게 성장하고, 이것은 곧 삶의 질로 이어진다고 확신하고 있다.

곽 소장의 호주제 폐지운동에서 유림은 의외로 강적이 아니다. 그의 최대 강적은 오히려 보수층 유권자를 의식하고 정치적 이해타산 속에 복지부동 혹은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정치권. 호주제 폐지 단일 사안에 대해선 14대 국회부터 본격적으로 국회 로비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곽 소장의 로비 제1원칙은 “'귀찮아 죽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틈만 나면 국회의원들을 자주 만나는 것”이다. 호주제 사안을 가지고 법제사법위원회 등 관련 의원들을 만나기는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17대 국회는 여성의원 39명을 배출해 '여성 정치세력화'란 평을 듣고 있기에 기대에 비례해 실망도 크다. 국가보안법처럼 호주제 폐지 촉구 서명운동도 여성의원들 사이에서 일 법도 하나 움직임이 없고, 호주제 폐지를 제1 정치 어젠다로 잡은 여성의원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9월만 지나면 재보궐 선거, 국정감사, 내년 예산안 심의 등 중대 사안에 걸려 호주제 폐지 문제가 비주류 문제로 밀려날 가능성이 너무나 높은데 정치권, 특히 여성의원들 사이에서 그다지 절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가까운 시일 안에 호주제 폐지를 낙관하지만, 글쎄…일을 많이 해 본 사람일수록 거기 비례해 자신감이 없어진다. 그 속을 깊게 들여다볼수록 어딘가에 복병이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후배들에겐 호주제 폐지를 위해 손해 좀 더 본다는 덜 이기적인 생각, 인내심 그리고 적극적 자세를 주문하곤 한다”

발로 뛰는 실무형 리더십-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가부장 문화 '밑동' 베내는 작업”

94년 여성연합과 인연'호폐' 운동 대중화 주역

여성관련 제도화 실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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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호주제 폐지 관련 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현 호주승계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면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결혼 전까지 남동생이 제 호주였다고 말했는데 현장에 있던 유림 쪽 관계자가 '애비 없는 자식이라 호주제를 없애려 한다'며 비판했습니다”

남윤인순(47) 한국여성단체연합(여성연합) 공동대표는 “뿌리깊은 가부장문화의 단면을 경험했다”며 “호주제 폐지운동은 의식과 관행을 바꾸는 작업이란 확신을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남윤 대표는 졸업 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94년 여성연합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여성운동과 인연을 맺은 남윤 대표는 여성계의 굵직한 현안들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왔다. 1990년대 가족법 개정, 성폭력특별법 제정,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여성노동관련법(모성보호법)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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