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더하는 말풍선]
AJS 작가 웹툰 ‘27-10’
자신의 고통 기록·긍정하고
담담한 글·그림으로 재현해
다른 생존자들 위한 ‘참고문헌’

AJS 작가 웹툰 ‘27-10’의 한 장면. ⓒ네이버웹툰
AJS 작가 웹툰 ‘27-10’의 한 장면. ⓒ네이버웹툰

*이 글은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순적이게도, 평범한 사람의 별일 없는 삶은 그를 찾아오는 고통에 대한 응답들로 만들어진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부서지는 경험이나 안전해야 할 장소에서 공포를 느끼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며, 이때 개인은 도망가기도 하고, 온몸으로 앓기도 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고통에 반응하는 순간들이 모여 평범한 나의, 평범한 남의 인생이 된다. 그리고 서로의 삶을 읽어낼 수 있을 때, 타인의 삶은 고통에 대처할 방법을 조언해줄 참고문헌이 되기도 한다.¹ 

AJS 작가의 『27-10』은 열 살 즈음부터 시작된 부친의 성폭력과 그로 인해 시작된 우울감과 분노, 그럼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며 살아온 시간의 기록이다. 작가의 페르소나 ‘그녀’는 역경을 딛고 일어나 성공하는 영웅도 슬픔에 잠식된 비극의 주인공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고통에 대한 응답은, 그것과 맞서 싸우거나 역으로 잡아 먹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었다. “고통의 시작은 타의였지만, 결말은 스스로 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28화). 

AJS 작가 웹툰 ‘27-10’의 한 장면.
AJS 작가 웹툰 ‘27-10’의 한 장면.

고통을 이야기로 엮어내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녀’는 폭풍우로 찾아와 그녀의 작은 보트를 집어삼키려 했던 우울의 바닷물을 퍼내며 생존했고 (11화), 이제는 깊은 곳에 숨겨둔 아픔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마음의 영토를 헤집는다 (29화). 폭력의 시작점을 가늠하고, 묻어뒀던 당시의 생각과 감정을 파내 직시하고, 고통이 ‘그녀’의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그것을 다시 글로, 만화로 옮기는 모든 노동은 고통을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은 이토록 지난함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AJS 작가 웹툰 ‘27-10’의 한 장면.
AJS 작가 웹툰 ‘27-10’의 한 장면.

그러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니, 고통의 한가운데 서 있을 당시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그녀’는 한데 뭉치고 응어리진 기억과 감정을 분리하고 긍정하는 법을 배우고, 그 시간을 견뎌온 “스스로를 조금 너그럽게 보게 됐다” (12화). 또 부친의 폭력을 주인공과 함께 견디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딸의 공포에 귀 기울이는 데 실패한 모친에 대해서도 새롭게 숙고할 수 있게 된다 (28화). 『27-10』은 “언어를 통해 지나간 고통의 기억을 애도하고 통합해, 고통이 파괴한 것과 가르쳐 준 것 모두를 간직한 채로 나를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² 자신의 고통을 긍정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정리하는 만큼 ‘그녀’는 성장한다. 

그렇기에, 『27-10』은 고통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녀’를 웃게 하는 소중한 친구들, 전공과 진로, 성 정체성, 반려묘 두 마리, 취향에 대한 이야기들이 동일한 무게와 중요성을 가지고 ‘그녀’의 시간을 채워나간다. 작가는 이를 철사뿐이던 뼈대에 찰흙으로 덩어리를 붙여가는 조소의 과정으로 연출한다 (8화). 구조물의 기본 근육이 다져지는 만큼 ‘그녀’의 마음의 근력 역시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사랑할 수 없는 것과 사랑해 마지않는 것이 통합돼 새로운 ‘그녀’를 만들어간다. 

AJS 작가 웹툰 ‘27-10’의 한 장면.
AJS 작가 웹툰 ‘27-10’의 한 장면.
AJS 작가 웹툰 ‘27-10’의 한 장면.
AJS 작가 웹툰 ‘27-10’의 한 장면.

AJS 작가는 삶을 파괴할 것 같았던 고통에도 끝내 파괴되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 서술 방식을 선택해 담담한 글과 그림으로 재현한다.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이고 따라서 보편적이지 않은 아픔일 수 있었던 고통은 ‘그녀’라는 대명사로 인해 한국의 모든 그녀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실제로, 작가는 도움이 필요한 어린 학생들이 쉽게 접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기획했다.³ ‘그녀’는 죽지 않고,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아서 “별일 없이 자란 어른”이 되었고, 바로 그렇기에 이제 “별일 없이 자란 수많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다 (6화). 고통을 이야기로 만드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 가치 있고 또 가능한 일이라고. ‘그녀’의 이야기는 수많은 ‘그녀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이야기로 만드는 데 있어 의지할 수 있는 훌륭한 참고문헌이 되어 주고 있다. 

 

참고문헌

¹ 하미나. "찾습니다, 고통에 대처하는 새로운 기술." 『월간 채널예스』, 워맨스 특집, 2021년 11월호, 2021.11.8. http://ch.yes24.com/Article/View/46297

²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동아시아, 2021, 264쪽.

³ AJS. “『27-10』 AJS작가 인터뷰.” 웹툰가이드, 2020. 2. 22. https://www.webtoonguide.com/board/rds01_interview/13201

AJS. 『27-10』. 네이버웹툰, 네이버시리즈, 2020. 
https://series.naver.com/comic/detail.series?productNo=9176971&isWebtoonAgreePopUp=true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