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로 비전 만드는 리더십-신혜수 정대협 상임대표

-“전쟁중 여성폭력 국제연대로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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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승자에 의해 으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치부되던 전쟁 중 여성강간에 대한 통념이 이젠 조직적 범죄로, 금지 처벌돼야 할 사안으로 전세계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된 인식 변화를 최대 성과로 꼽고 싶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과거사가 아닌 보스니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접경지역,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등 세계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현재사다”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운동의 제2세대 '현역' 신혜수 정대협 상임대표는 1991년 7월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즉시 대학 스승인 이효재 당시 정대협 공동대표의 “혜수야, 도와줄래?”란 러브콜을 받았다. 이화여대 최초 이념서클 '새얼'의 지도교수였던 이효재 선생과의 인연은 후에 영문학도인 그를 사회학도로 방향을 틀게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게다가 윤정옥 공동대표 역시 첫 전공인 영문학과 스승이었으니 그의 표현대로 “정신대 운동에 발을 담게 된 것은 거의 운명”이었다. 그는 영어 구사가 자유롭다는 이유로 1992년 1월 정대협 국제협력위원장으로 임명됐고, 그해 여름 제네바에 있는 유엔 인권위원회를 이효재 대표, 정진성 교수, 황금주 전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와 함께 방문해 소위에서 연설을 하고 프레스룸에서 외신기자들과 접촉함으로써 국제연대활동가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국제 활동가들과 연대를 다지고 파트너십을 형성해가면서 일본군위안부 이슈는 세계 무대에서 점화되기 시작했다.

'로비의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신 대표의 국제연대 리더십의 첫 특징은 즉각적 수용과 빠른 적응력일 것이다. 1992년 8월 당시 유엔 인권소위에서의 연설을 위해 그는 어떠한 사전 준비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오재식 WCC 국장의 집에서 1시간 가량 인스턴트 오리엔테이션을 거친 후 곧바로 유엔 로비에 투입됐고, 그 후 상황은 정신없이 전개됐다.

다음으론 주변 국제활동가들과의 파트너십을 위한 지속적이고 열정적이며 배려의 관계맺기를 들 수 있다. 그는 초기 유엔 활동에서 앞서 유엔 활동을 시작한 일본의 인권변호사 도츠카와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의 당위성에 공감대를 형성해 오랜 기간 상호협력적인 파트너십을 맺어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 도츠카 변호사는 신 대표와의 교류를 통해 여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1994년 유엔 인권위에 신설된 '여성폭력문제 특별보고관'이 된 스리랑카의 변호사 쿠마라스와미와의 관계에서도 신 대표 특유의 파트너십 원칙은 그대로 적용됐다. 가장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쿠마라스와미가 연구 첫 주제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채택하게 하기 위해 2시간 면담을 위해 사흘 걸려 스리랑카로 날아간 것이다. 이를 매우 인상 깊게 받아들인 쿠마라스와미는 탁월한 능력으로 9년간 보고관 임기를 거듭하며, 1996년, 2000년, 2003년 보고서에서 국가 차원에서의 폭력문제의 대표적 사례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계속 언급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국제적 환기에 큰 몫을 하게 된다. 물론 그 배경엔 쿠마라스와미의 보고서에 대한 신 대표의 열정적인 피드백이 주효했다. 둘 다 아태지역 여성운동단체 APWLD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지속적 교류가 가능하긴 했지만 쿠마라스와미는 종종 “내가 눈 돌리는 데마다 혜수가 있다”는 말을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곤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지만, 신 대표는 언어 구사능력과 유엔 등 국제기구와 관련 회의에 대한 정확한 정보, 시스템 파악, 그리고 그때 그때 국제 상황을 활용할 줄 아는 센스를 갖추고 있었다. 1991년 국제 사회에 충격을 던지며 터져 나온 보스니아 사태를 재빨리 일제강점기 군위안부 문제와 연결해 전쟁 중 강간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교묘한 메커니즘의 범죄인지를 설득시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내외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했지만, 피해 할머니들은 계속 돌아가시고 있고, 10여 년이 흘러도 일본정부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이제 정신대운동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고, 새롭게 국면을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앞으로 기념관 등을 건립해 일본군위안부 이슈를 전쟁 중 여성인권 문제로 현재화하고, 여성 평화운동의 주요 이슈로 확장해야 한다. 한편으론 한국이 흑인여성인권운동 등 해외 여성운동과 손잡고 국제연대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신 대표의 최대 고민 중 하나는 아직도 국제로비스트로서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할 후배를 길러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내거는 후배 육성을 위한 조건은 해외활동을 위한 적지 않은 경비를 충당할 기금과 영어 구사능력, 그리고 운동역량이다. 이를 위해 외교부 등 민·관 차원에서 육성기금을 조성해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확고한 역사의식의 리더십-이효재 정대협 초대 공동대표

-“한·일 미래 위해 정신대운동 시작”

"정신대 운동의 목표는 우리 민족 여성 및 아시아 여성들이 일본의 성노예로 짓밟힌 인권을 회복하고 한·일관계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새로운 관계로 발전시키는 데 있다. 또한 인류 전쟁사에서 여성들에게 강요된 성노예와 집단강간의 만행이 재현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윤정옥 교수와 공동으로 정대협 초대 공동대표 맡아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이슈화에 앞장...국제사회 주목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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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발족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초대 공동대표를 지낸 이효재(81)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대학동창이자 동료교수인 윤정옥 정대협 공동대표와 함께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진상규명과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해왔다.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는 유엔인권위원회의 여성폭력문제 특별보고관의 조사와 보고서 발간으로 외화됐다. 이를통해 유엔공식문서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영원히 기록되게 하는 성과도 남겼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위안부 제도가 범죄행위이며 국제법 위반이란 것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식민지에서 해방된지 올해로 59주년을 맞지만, 이 교수는 "진정한 해방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남북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반도가 해방된다는 믿음은 학자로서, 운동가로서 그의 소신이기도 하다.

진해서 제2의 인생...지역사회와 여성운동 결합 실험중

74세가 되던 해인 1997년, 이 교수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들이 있는 경상남도 진해로 내려오면서 여성운동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지금도 후배 여성운동가들과 제자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면 언제든 서울 행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1970년, 80년대 진보적 여성운동의 지표를 제시하며 실천에 앞장섰던 이 교수는 은퇴한 후배들에게 넉넉한 그늘이 되고 있다.

그의 삶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지식인의 초상을 엿볼 수 있다. 1958년 이화여대 사회학과에서 교편을 잡은 이 교수는 가족학 연구의 권위자로 많은 연구 업적을 남긴 한편 직접 사회변혁 운동에 뛰어든 운동가였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의 흐름속에 탄생한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단체연합, 정대협 등 진보적 여성단체를 주도적으로 만들고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며 사회변혁을 이끌어왔다.

이 교수는 '분단시대의 사회학'에서 민족문제, 분단구조가 가부장제를 악용해 여성을 착취하고 평등한 가족법 개정조차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해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1980년 신군부 정권에 의해 진보적 지식인으로 분류된 이 교수는 강단에서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서 벗어나는 일에 결코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97년 정부에서 수여하는 훈장을 5공 인사와 함께 받을 수 없다고 거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반대하며 50여년간 가족학 연구에 매달린 이 교수는 지난 3월까지 조선조의 가부장제가 어떻게 노비, 서민층까지 내면화 됐는지를 살피는 학술서'가부장제 연구'를 발간하는 등 왕성한 학술 연구 작업을 벌이고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진해는 이 교수에게 제2의 고향이다. 1957년 별세한 아버지 이약신 목사는 어머니와 함께 1945년부터 고아들을 집에서 돌보기 시작했고 6.25 전쟁이후에는 부모를 잃은 전쟁 고아들을 위해 경신재단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고아 복지 사업에 힘을 쏟았다. 이 교수는 경신재단 부설 기관인 경신사회복지연구소 소장을 맡아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부모님이 진해에서 벌인 사회사업과정을 총정리하는 가족사 편찬 작업을 틈틈이 진행하고 있다.

이 교수는 진해에서 평소 지론이었던 '지역사회의 주인은 여성'을 실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는 “여성운동이 지역사회 운동과 결합해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들고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어린이들을 제대로 교육하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그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기적의 도서관'유치 계획을 세워 2월 어린이도서관 개관을 성사시켰다. 이 도서관에는 하루 평균 400명의 주민과 어린이들이 방문하는 지역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젊은 주부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이 교수는 현재 도서관운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프로그램 개발과 정책 제안에도 활발히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명망있는 여성운동가 중에는 이 교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꽤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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