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 번째 개인전 연 언경 작가
여인 초상화·초현실적 그림의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주목받아

폭력·학대의 경험을 창작 동력 삼아
마영신 작가 웹툰 ‘호도’로도 각색돼
“제가 잘되는 게 복수...
애니메이션·동화 등 하고픈 작업 전념할 것”

언경 작가가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 다다프로젝트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언경 작가가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 다다프로젝트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언경(34) 작가가 그린 여인들은 눈이 크다. 또렷한 눈매, 풍성한 속눈썹, 상념에 잠긴 듯 살짝 눈을 내리깐 모습이 오랫동안 시선을 붙든다. 오일 파스텔과 색연필로 채색했는데, 얼핏 유화로 보일 만큼 화려한 색감이 고혹적이다.

평범한 ‘미인도’는 아니다. 피 묻은 칼을 든 여자의 새까만 눈, 흰자가 보일 만큼 눈을 치켜뜬 여자들은 사납고 오싹한 상상으로 보는 이를 인도한다.

언경 작가의 ‘어서오세요’ 연작들.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23 ⓒ이세아 기자
언경 작가의 ‘어서오세요’ 연작들.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23 ⓒ이세아 기자
(위부터) 언경 작가의 ‘거짓말’,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21 / ‘아니, 이미’,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20 ⓒ이세아 기자
(위부터) 언경 작가의 ‘거짓말’,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21 / ‘아니, 이미’,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20 ⓒ이세아 기자
언경 작가의 ‘숲’,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19 ⓒ다다프로젝트 제공
언경 작가의 ‘숲’,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19 ⓒ다다프로젝트 제공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다다프로젝트에서 언경 작가를 만났다. 어쩐지 작가를 닮은 그림 속 불온한 여자들의 ‘사연’을 물었다.

“자화상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아니에요. 밝고 좋은 기운을 가진 얼굴들은 아니죠. 웃지 않는 여자들이고요. 특별한 의도나 이야기, ‘정답’을 정해두고 전달하려는 의도는 없어요. 저는 오히려 관객들이 제 그림을 보고 들려줄 이야기가 궁금해요. 그림을 보다 보면 ‘다른 세상에 어서 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리진 않는지도요.” 그래서 전시 제목도 ‘어서 오세요’다.

언경 작가는 계원예대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2008년 단체전을 시작으로 2014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회화를 주로 그리면서 앨범 커버, 만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참여한 애니메이션 ‘HOME’은 제9회 인디애니페스트, 제11회 아시아국제단편영화제, 제12회 플로렌스-한국 영화 예술제, SBS ‘애니 갤러리’(Ani Gallery) 등에서 상영됐다.

언경 작가의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19 ⓒ다다프로젝트 제공
언경 작가의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19 ⓒ다다프로젝트 제공
언경 작가의 ‘숨’,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21  ⓒ이세아 기자
언경 작가의 ‘숨’,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21 ⓒ이세아 기자
언경 작가의 ‘아무도 울 수 없는 자리’,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22 ⓒ이세아 기자
언경 작가의 ‘아무도 울 수 없는 자리’, 오일 파스텔, 색연필, 종이에 혼합매체, 2022 ⓒ이세아 기자

평소 “캔버스에 손이 가는 대로 그림을 완성하는 편”이지만, 전설과 신화를 연상케 하는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천사, 사슴이 등장하는 그림들이 그렇다. 언경 작가에게 천사는 “내가 원했던 위로를 전하는 존재, 숨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인 동시에 “마냥 선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존재”다.

사슴은 “약자, 포식동물의 먹잇감, 그런 면에서 나 자신을 닮은 존재”라고 언경 작가는 말했다. 어릴 때부터 가정폭력·학대, 따돌림, 성폭력 등을 겪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는 어둡고 무거운 제 감정들을 가까이에서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감정들을 창작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하기도 해요.”

김노암 미술평론가는 “일찍이 쉽지 않은 삶의 굴곡을 경험한 언경의 지난 삶을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다면 그림 속 여인이 비범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며 “언경의 개인사는 보편적 여성사를 은유한다. 그러기에 드로잉과 채색과 음영이 여인과 여인의 눈으로 수렴하는 동시에 언경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낸다”고 평하기도 했다.

언경 작가가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 다다프로젝트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언경 작가가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 다다프로젝트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웹툰 제작에도 참여했다. ‘만화계 오스카’로 불리는 미국 ‘하비상’을 수상한 마영신 작가가 기획하고, 언경 작가가 원안을 쓴 후 각색을 거쳐 카카오웹툰 연재작 ‘호도’로 탄생했다. 총 18화짜리 짧은 웹툰인데, 이달 초 공개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입소문을 타고 조회수 18만을 기록했다. 종이책으로도 펴낼 예정이다. 

“저는 무척 염세적이었고 오랫동안 죽음에 대해 생각했어요. 분노조절장애, 조울증 등으로 치료받아왔고요. 제가 겪은 일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하고 싶어서 글을 썼어요. 각색을 거친 ‘호도’는 온전한 제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위로받고 눈물을 흘렸다는 독자들이 참 많아요. 이상하고 신기해요.”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는 남편, 그의 은인이라는 에릭 오 감독, 마영신 작가, 김노암 평론가 등에게도 감사를 전했다.

“제가 잘되는 게 (폭력·학대 가해자들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살려고요. 예전에는 생각이 너무 많았는데, 이제 좀 더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만들려고요. 애니메이션도 제작하고, 화보와 동화책도 내고 싶어요. 전시도 많이 열려고요. 오는 8월에도 개인전을 열 예정이에요. 그림 그리느라 더 바쁜 한 해가 됐으면 좋겠어요.” 전시는 오는 2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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