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아니 에르노 소설 원작
여성 감독 다니엘 아르비드 연출
열병 같은 사랑에 빠진 여성 지식인 통해
솔직한 욕망·경계 넘는 상상력 그려

영화 ‘단순한 열정’(감독 다니엘 아르비드)의 한 장면.
영화 ‘단순한 열정’(감독 다니엘 아르비드)의 한 장면.

“작년 9월 이후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 유명한 문장을 드디어 스크린으로 만나는 순간이 왔다. 영화 ‘단순한 열정’이 지난 1일 국내 개봉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시놉시스는 도발적이다. 유명 작가·교수이자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다.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는 점에서 1991년 발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0일간의 원나잇 스탠드’, ‘로스트 맨’ 등 관능적인 사랑과 관계를 아름답게 그린 여성 감독 다니엘 아르비드가 메가폰을 잡았다.

일종의 로맨틱 판타지인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금기시된 사랑에 빠진 여자’를 단죄하거나 ‘속죄’를 그리지도 않는다. 열병 같은 사랑이 절정에 치달아 끝날 때까지, 여자의 얼굴과 몸짓과 목소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곁에서 지켜보게 하는 영화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엘렌(라에티샤 도슈)은 우연히 만난 젊은 러시아 남자 알렉산드르(세르게이 폴루닌)와 사랑에 빠진다. 원작엔 구체적 성적 묘사가 없지만 아르비드 감독은 두 사람의 성관계 장면을 강조한다. 엘렌이 알렉산드르에게 성적으로 이끌리고, 그를 적극적으로 유혹하기도 하다가, 관계가 거듭될수록 엘렌의 마음이 깊어지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 ‘단순한 열정’(감독 다니엘 아르비드)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단순한 열정’(감독 다니엘 아르비드)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엘렌은 사랑에 빠진 평범한 여자다. 맨얼굴에 긴 머리를 대충 묶고 다니다가도, 남자와 만날 때 입을 섹시한 옷을 사고, 화장에 신경 쓰고, 자신과 정반대인 남자의 취향과 러시아어도 이해하려 노력한다. 만나자는 전화를 놓칠까 봐 강의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남자가 연락이 없으면 초조해한다. 불륜인 줄 알면서도, 아들이 눈치챌까 조심하면서도, 남자를 찾아다니다 모스크바까지 날아간다. 일과 논문을 팽개치고 정신과 상담도 받는다. 

그럴수록 끝이 다가온다는 감각은 선명해진다. 라에티샤 도슈의 허탈하고 담담한 감정 변화 연기가 인상적이다. “사랑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아니 에르노 소설 『단순한 열정』 중)

영화 ‘단순한 열정’(감독 다니엘 아르비드)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단순한 열정’(감독 다니엘 아르비드)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문학사에서 배제된 여성 시인에 대해 연구하고 강의하는 엘렌은 자타공인 “페미니스트”다. 친구는 충고한다. “남자는 여자를 차지하고 나면 얕잡아 봐. (...) 난 요즘 페미니스트들을 지지해. 섹스도 생활도 없이 남자에게 의존하는 거 용납 못 해.” 엘렌은 대꾸한다. “사랑하면 순종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어.”

남성의 기쁨을 위해 오롯이 헌신하겠다는 선언은 아니다. 사랑 그 자체에 망설임 없이 투신하겠다는 고백이 아니었을까. 엘렌의 관심은 다른 ‘사랑에 빠진 여자’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장된다. 사랑할수록 엘렌의 눈과 귀는 더 멀리 가닿는다. “마트나 은행에서 여자들을 볼 때면 저들도 계속 어떤 남자를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다른 여자들과 자신을 겹쳐 보며 동질감과 위안을 느끼기도 한다.

여성들은 다음과 같은 ‘충고’에 익숙하다. 여자는 사랑받아야 한다,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너희는 사랑받을 때만 가치 있다, 그 가치는 스스로 정할 수 없고, 가부장 사회가 너희의 값을 매길 것이다. 교묘하게 여성을 억압하는 담론을 영화는 가볍게 뛰어넘어 버린다. 사랑에 빠진 여성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는지, 부나비처럼 사랑에 뛰어든 여성이 “경계에 다가서고, 경계를 뛰어넘는 상상을 할 정도로”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아니 에르노 소설 『단순한 열정』 중)

영화를 보고 나면 “원작의 모든 부분을 여성의 관점으로 담으려 했다”는 아르비드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제73회 칸영화제,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제68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제42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 등에서 상영됐다. 

영화 ‘단순한 열정’의 다니엘 아르비드 감독.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단순한 열정’의 다니엘 아르비드 감독. ⓒ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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