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문화이야기]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문학동네 펴냄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씀, 최정수 옮김. 문학동네) ⓒ문학동네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지난해 10월 아니 에르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을 때 <여성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니 그녀를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아이콘‘이라고 했다. 다른 대부분의 언론들도 에르노를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국내에서 에르노의 대표작처럼 알려진 『단순한 열정』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불륜을 다룬 작품이다. 궁금증이 급발동한다. 대체 골수 페미니스트 작가의 사랑이 단순할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가 하필이면 유부남과 사랑을 했던 특별한 철학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런 거창한 궁금증들은 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이내 “어, 이거 뭐지…” 하는 당혹스러운 느낌으로 바뀌어 버린다. 첫 문장부터 그러하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무슨 페미니스트가 이 모양인가. 명색이 페미니스트라면 더구나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작가라면 남자 앞에서 가끔은 “사랑따윈 난 몰라”하며 호통도 치는 당당한 사랑을 할 줄 알았는데, 고작 한 남자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모습이라니. 같은 페미니스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에르노의 솔직한 고백은 곳곳에서 이어진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관심을 갖는 유일한 화제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나라, 혹은 그 사람이 가봤던 장소 등, 그 사람과 관련 있는 것들 뿐이었다.”

“나는 이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보낸 오후 한나절의 뜨거운 순간이 아이를 갖는 일이나 대회에서 입상하는 일, 혹은 멀리 여행을 떠나는 일보다 내 인생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감상적인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실비 바르탕이 노래한 ‘사람아, 그건 운명이야’를 들으면서 사랑의 열정은 나만이 겪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르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한 남자와의 지독한 사랑에 빠졌다. 부끄러움 따위는 의식하지 않는 그녀의 솔직한 기억들로 책은 가득차 있다. 심지어 군데군데 외설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에르노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한 여자』, 『남자의 자리』 등을 통해 부모에 대해 느꼈던 부끄러움,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을 솔직하게 기록했던 에르노였다. 『단순한 열정』은 한술 더 뜬 글이다. 자신의 적나라한 불륜 행각을 세상 사람들에게 고백해 버렸다. 남들은 의식할 부끄러움이란 것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작가. 숨겨도 될 법한 은밀한 사연들을 어째서 에르노는 글로 써서 굳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일까.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그러니 에르노가 사랑에 빠졌던 시간은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하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사랑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에르노가 쌓아올렸던 사유와 자존은 열병 같은 사랑 앞에서 모두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남들과는 달리, 정해진 선을 넘어 어디까지 가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은 욕망이었을까.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을 내고 10년 뒤에 그 모태가 되었던 일기들을 『탐닉』을 통해 공개한다. 그녀에게 “이 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열정과 고통의 외침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동화 같은 사랑에 빠질” 욕망이기도 했다. 그러니 『단순한 열정』 속에는 열정과 고통, 동화 같은 사랑에 대한 욕망이 섞여 있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영화로 만들어진 『단순한 열정』은 얼마나 단순한가. 마침 에르노의 원작의 이 영화가 개봉되었길래 상영관을 찾아갔다. 다니엘 아르비드 감독의 영화는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단순한 욕정’으로 만들어 버렸다. 성적 욕망만 이글거리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원작에 ‘단순한’이라는 형용사가 들어갔어도 그렇지, ‘열정’조차도 어떻게 그리 단순할 수만 있겠나. 단순하다니까 정말로 단순하게 만들어버린, 그래서 19금의 장면들과 음악만이 기억나는 영화. 굳이 에르노의 원작이 없어도 만들 수 있을 영화였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사진=홍수형 기자
유창선 작가 사진=홍수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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