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아의 딸’

 

김정은 감독의 영화 ‘경아의 딸’ 스틸컷. ⓒ㈜인디스토리
김정은 감독의 영화 ‘경아의 딸’ 스틸컷. ⓒ㈜인디스토리

 

오래된 진행형의 과오들
영화 ‘피고인’을 소환하다

작년 한 해 여성, 엄마를 침묵하게 했던 영화 <경아의 딸>. 연수(하윤경 분)의 ‘성관계 동영상 유포’라는 사건은 얼굴 없는 다수의 눈에 유린당하는 한 여성의 절망적 공포를 절제된 현실감 속에서 표현한다. 가장 가까운 여성으로 당연한 ‘엄마’는 과연 ‘가까운가’를 묻는 다양한 대사들도 이 작품을 문제작으로 만든다.

<경아의 딸>은 1988년 문제작이었던 영화 <피고인(The Accused)>을 소환한다. “야한 차림으로 남자들을 성적으로 유혹했나요?” “술을 마셨나요?” 술집 오락실에서 윤간당한 세라(조디 포스터 분)에게 쏟아지는 검사의 질문은 본질을 벗어나 여성의 정숙의 문제로 사건의 패러다임이 바뀔 위기에 놓인다. 경아(김정영 분)가 휴대폰을 집어던지며 소리 지르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도대체 이런 건 왜 찍어?”

원제인 ‘The Accused’를 번역해보면 ‘기소된 사람들’이다. 범행의 당사자 뿐 아니라 세라가 윤간당하는 현장에서 환호하며 ‘범죄를 부추기던 구경꾼들’ 모두 유죄 판결을 받고 열흘간 구류에 처해진다. 이 장면이 묵직한 감동을 끌어낸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사진찍기에 몰두한,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평범한 얼굴들 또한 이들을 닮아 있다.   

영화 ‘피고인(The Accused)’의 한 장면.
영화 ‘피고인(The Accused)’의 한 장면.

숨기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대사들

과장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일상적인 말들이 영화의 대사가 되어 등장하니 관객은 당혹스럽고 꺼림칙하다. “긴 게 더 예쁜데.” 커트한 머리를 흔들며 엄마의 반응을 기대하는 연수를 무시한 채 경아는 자신의 선호만을 말한다. 엄마인 경아는 딸 연수의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확신하는 듯하다. “너 머리 또 잘랐니?” 핀잔이 묻어 있는 엄마의 손길은 연수에게는 타인이 함부로 신체를 건드리며 조롱하는 모욕이 된다. “선생이 옷차림이 이게 뭐니?” 신체의 아름다움을 노출하고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규범을 벗어난 것인가? 타인이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 ‘되고 싶은 나’를 포기해야 하는가? 애정으로 포장한 월권은 건강한 자녀의 반항을 부르고 반항하지 못하는 자녀는 자력이 쇠퇴한다. 이로써 행복의 조건에 대한 감각이 손상될 우려가 있다.

‘내 탓’은 사과와 보상을 요한다

여성을 질타하고 억압하는 사회적 기제들은 클리셰일 뿐이다. 그런데 진부함은 익숙함에 편승해 편안함을 준다. “그래, 내가 너를 잘못 키웠어. 내 탓이다.” 경아의 이 말은 진심이 아닌 일시적 자리 모면의 나약함인데 ‘내 탓’이 요하는 사과와 보상을 준비하지 않고서 쉽게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아는 알지 못한다. 남편의 가스라이팅과 폭력을 벗어날 방법을 모른 채 연민과 경제적 이유라는 보편적 인간사 안에서 체념하며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교사로 취업하고 독립한 연수에게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있다. 엄마와 딸(부모와 자녀)은 ‘20년 내지 30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시공간에 등장한 생명체’인 동시대인이다. 종속을 강요하고 참견이 정당한 관계가 아니다. 연수가 경아에게서 정신적으로 독립해 있는 반면 ‘딸 자랑과 잔소리’의 이중언어로 연수에게 의존하는 경아에게서 흔한 엄마의 모습을 본다. 

김정은 감독의 영화 ‘경아의 딸’ 스틸컷. ⓒ㈜인디스토리
김정은 감독의 영화 ‘경아의 딸’ 스틸컷. ⓒ㈜인디스토리

내면을 보는 여성, 여성을 돕는 여성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성은 강하다. 연수는 같은 여성인 엄마의 힐난을 비롯한 디지털 공간 속 익명의 존재, 친구라고 할 수 없는 친구들의 비웃음과 조롱에 휘둘리지 않도록 자신 안에 침잠하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있다. ‘쑥맥’에 포함된 ‘무지’의 미화, 혹은 환상의 ‘구걸’이 갖는 안일함, 성적 ‘표현’에 솔직한 여성을 ‘걸레’로 던지는 폭력성이 경아의 경험치가 돼 연수에게 전이되려는 찰나. 감독은 여성 내면의 현실에 접근, 독소를 걷어내고 긴장의 끈을 붙잡아 생존을 향해 가라고 외친다. 계속 나아가길 독려하며 동행하자고 손짓하는 상순(이채경 분)과 동료 교사는 여성에게 덧씌워진 편견을 걷어내고 ‘여성의 삶을 돕는 건 결국 여성’이라는 고래의 진실을 드러낸다.

관객은 심리적 데자뷰와 함께 경아와 연수 사이를 오가며 각각 독립 개체로 분리시킨다. 경아의 삶, 연수의 삶은 독립돼 있으면서 존중을 기반으로 소통하는 동시대인의 삶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수의 건강한 자의식은 엄마 경아의 자각을 향한 내면의 깃발을 휘날리게 하고 연수의 부서진 노트북을 수리하는 진정한 엄마로 살려낸다. 동시에 이름 없는(untitled) 파일이 경아의 손으로 열리는 것은 딸의 실존을 떠받치는 실천적 모성의 은유다.

경아와 연수, 그리고 연수가 지도하는 학생인 하나를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여성을 본다. 막연한 자책이 아니라 기억을 분석하고 책임지는 해결안을 모색하고 후회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나아간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융성한 시대의 가해자들은 기소하기 어려운 투명 인간이다. 그 때문에 감독의 시선이 응징을 넘어 피해자들의 삶의 지속의 문제에 역점을 두고 미래를 원한다면 변화가 보이는 길로 ‘건너가라’고 말한다. 

김정은 감독의 영화 ‘경아의 딸’ 포스터. ⓒ㈜인디스토리 
김정은 감독의 영화 ‘경아의 딸’ 포스터. ⓒ㈜인디스토리 

어리석은 자 악을 선택한 자

상현은 연수를 구경꾼들의 먹이로 던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악인이다. 그저 못난이, 찌질이 정도로 연민을 얹어 봐줄 일은 아니다. 성인은 ‘자기 일은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아.” 상현 모의 말처럼 독립 존재의 일은 타인(부모)에겐 그저 보고 있기도 힘든 일일 뿐이다.

욕망과 갈등 앞에서 윈윈(win-win)하는 ‘선’의 길은 고독한 인내의 과정이 필요해서 쉽지 않으나 쉬운 길을 택하더라도 딱히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게 아닌 걸 택하는 어리석음, 자기 내면을 볼 수 없는 나약함은 ‘악’을 택하는 선행조건이다. 선과 악은 문을 열고 마주 보는 우리 내면의 두 방과 같다. 우리 안의 폭력성이 활성화될 때를 인지하고 처리해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필자: 문수인 작가. 시집 '보리밭에 부는 바람' 저자. 현재 SP 영화 인문학 강의 중.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