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문애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이사장

 

문애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이사장 ⓒ홍수형 기자
문애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이사장 ⓒ홍수형 기자

“기술의 우위가 국제사회의 패권을 좌우한다는 뜻의 ‘기정학(技政學) 시대’ 입니다. 과학기술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인재를 키우고 지원해야 합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로 성장하는 토대를 만드는 일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위셋)을 이끄는 문애리 이사장은 “기술패권이 국제정치를 좌우하는 기정학(技政學)적 시대를 맞았다”고 진단했다. 과학기술이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죽고 사는 문제’가 됐다는 뜻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연일 과학기술을 강조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국가 발전을 넘어 생존의 문제라고 본다. 지난 1월 10일 과학기술·정보통신(IT) 신년 행사에 참석해 “과학기술과 디지털 경쟁력이 국가의 미래, 생존과도 직결되는 시대”라고 말했고, 1일에는 “국가발전의 동력은 과학기술이고, 인재 양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정학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재 확보가 급선무다. 문제는 인구 감소로 이공계 인력난이 불 보듯 뻔하다는 점이다. ‘다양성 확보’는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핵심 열쇠다. 문 이사장이 “그동안 활용이 저조했던 여성과학기술인을 보다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자 10명 중 2명만 여성
여성과기인의 디딤돌, 위셋

문 이사장은 지난해 11월 취임 이후 여성과기인 정책 인식 전환을 위해 현장성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엔 한국화학연구원(KRICT)을 방문해 여성과학기술인이 직면한 어려움을 나눴다. 연구의 지속을 위한 일가정양립 제도가 있어도 연구 현장 및 문화 때문에 많은 여성과학기술인은 해당 제도를 활용하기 어렵다. 제도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과학기술분야 연구기관에 재직 중인 인력 25만2111명 가운데 여성 비율은 21.5%%(5만4201명)에 불과하다(‘2020년 여성과학기술인력 활영 실태조사 보고서’). 2020년 신규 채용된 인력 중 여성의 비율은 28.1%로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직급이 높을수록 성비 격차는 더 벌어진다. 신규채용 단계에서 28.1%였던 여성 비율은 재직 21.5%, 보직(관리직) 12%, 연구과제 책임자 11.4% 등 직급이 높아질수록 낮아진다. ‘유리천장’과 ‘경력단절’은 여성 과학자들도 흔하게 겪는 문제다. 이들이 경력단절에 처하는 가장 주된 원인은 가사와 육아였다.

문 이사장은 과기인이 일하면서 육아할 수 있는 유연한 근무형태와 모성보호제도가 안착해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유지하며 경력을 지속적으로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기술 분야는 특성상 기술 발전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한번 경력단절이 되면 다시 따라잡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에서 여성과학기술인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 포용적인 문화 환경이 과학기술계에 투영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다.

“현재 여성 과기인을 지원하는 법제도는 많이 갖춰져 있습니다. 문제는 현장과 제도의 간극입니다. 육아휴직의 경우, 이용자가 있는 과학 관련 기관은 18%에 그친다는 보고가 있어요. 현장 얘기를 들어보면 육아휴직을 쓸 때 여전히 눈치가 보인다고 하고요. 게다가 과학기술 전문 인력이 1년 자리 비우게 되면 업무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제도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사회 전반의 시스템이 갖춰져야 합니다. 육아는 여성만의 몫이 아니잖아요. 남성 과기인도 눈치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풍토가 마련돼야 해요. 위셋이 업무공백 최소한 하기 위한 대체인력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수요가 높고 호응이 좋아요. 다만 한정적인 예산으로 많은 기관이 혜택을 볼 수 없는 한계도 있습니다.”

위셋은 여성 과기인의 경력중단을 예방하고 연구현장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데 집중하고 있다. ‘R&D 경력복귀 지원사업’을 통해 경력단절 여성에게 다시 본인의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취업을 위한 교육과 멘토링을 제공하고 있다. 이 사업으로 지금까지 약 1200명의 여성들이 연구개발 인력으로 복귀했고, 복귀자 중 약 80%가 경력을 유지하고 있다. ‘R&D 대체인력 활용 지원사업’은 출산·육아 휴직, 육아기 단축근로 발생기관에 대체인력을 매칭하고, 채용 지원을 통해 업무 공백 최소화에 도움을 주고 있다. 대체인력으로 투입된 여성과학기술인은 이 과정에서 실무능력을 습득하고 경력을 쌓을 수 있다. 

문애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이사장 ⓒ홍수형 기자
문애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이사장 ⓒ홍수형 기자

 

다양성 확보는 곧 경쟁력 
여성 과기인 육성·활용 중요

문 이사장은 “다양성과 포용은 과학기술계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성별 다양성은 더 이상 사회적 책무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 지원정책이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듯 조직의 다양성과 포용적 문화는 조직 전체의 경쟁력이 높이는 필수요건으로 평가받는다.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다양성은 연구개발과 혁신의 성과를 높이는 데 중요하다. 신기술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데 다양한 생각과 경험이 반영된다면 보다 우수한 아이디어를 도출할 수 있다. 연구개발에서 다양성이 고려되지 못한다면 그 결과물은 한쪽으로 편향될 위험이 있다. 성별 편향성 문제로 아마존은 수년간 개발하던 인공지능(AI) 채용 프로그램을 폐기했다. 시스템은 “경력 10년 이상 남성지원자 이력서”만 추천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들어간 이력서는 평가 절하했다.

문 이사장은 위셋 지원제도의 실효성을 점검하고 공감받는 정책으로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자문 조직을 구성했다. 그는 여기에도 다양성을 담았다. 남성, 젊은 과학기술인 등 다양한 성별·연령대로 구성된 정책자문위원회를 통해 현재 지원 제도에 대한 실효성을 점검할 전망이다. 위원회는 정책자문위원장 고려대 정진택 총장 등 12명으로 구성됐다.

유방암 전이 기전 연구 권위자
여성 과기인 돕는 든든한 리더로

여성 과기인의 든든한 버팀목인 문 이사장은 학계에서 인정받는 유방암 전이 기전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다. 서울대 약대 약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촉망받는 연구자로서 한국에 돌아왔지만 그의 앞날은 불투명했다. 당시 여성 이공계 교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했다. 국책연구기관에서 연구를 수행하던 그는 1996년 덕성여대 약대 교수로 부임할 수 있었다. 1997년 미국 웨인주립대 교환교수를 지내며 유방암 전이의 신호전달경로 연구를 시작했고 결국 암세포 전이 유전자와 관련 효소의 역할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여성이 과학기술인으로 살아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던 시기였어요. 이런 현실을 극복하는 첫 번째 조건은 물론 여성 과학자 스스로 전문지식과 실력을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제 연구에만 집중했지요.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두 딸까지 키우자니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전혀 없었어요. 우리나라 대표 여성 과학자인 나도선 박사님의 호출을 받고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 창립(2001)을 돕는 일을 시작하면서 환경과 후배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나의 일 이상으로 공공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는 다수의 국가연구개발사업은 물론이고 학내 보직과 단체 활동, 후배 멘토링 등을 마다하지 않았다. 문 이사장은 여성 과기인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맡은 일을 해내는 책임감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여성을 자리에 앉혀 놨더니 뭐가 잘 안 되더라, 이런 소리를 듣기 싫었어요. 제 본연의 일들뿐만 아니라 이렇게 뜻하지 않은 역할들에서도 내가 최선을 다하고 모범이 되어야 다른 후배들에게도 길이 열린다는 사명감을 잊지 않으려고 했어요.”

문 이사장은 올해 연말 여성 과학단체의 통합 연차대회를 계획하고 있다. 그는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는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20주년을 맞는 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출범 10주년을 맞는 위셋이 함께 통합 연차대회를 열고 여성 과기인 육성과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려고 한다”고 밝혔다. 문 이사장의 바람대로 위셋이 여성 과기인이 딛고 성장할 수 있는 디딤돌이자 경력중단을 겪지 않도록 견디는 힘을 주는 굄돌로서 안착하길 기대한다.

*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위셋)

정부의 여성과학기술인 육성·지원 정책을 실행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2004년 ‘전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로 설립된 이후 지금껏 여성과학기술인의 자질과 능력이 발휘되는 사회를 구현해, 국가과학기술 발전과 사회적 가치 실현에 이바지하기 위해 힘써왔다. 주요 사업으로는 △이공계 여성 일자리 발굴 및 연계 △ 이공계 취업 및 경력개발 교육 및 멘토링 △여성과학기술인 법제·도 지원 △여성과학기술인 정책 연구 및 통계 조사 △ 과학기술계 다양성&포용성(DE&I) 문화조성 캠페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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