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용어로 판결문 써 달라” 요청에 응답한 재판부 “장애인의 당연한 권리”
“장애인 위한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 제공 의무화” 최혜영 의원 대표발의

'이지리드(easy read)’ 판결문 일부. 사진=서울행정법원
'이지리드(easy read)’ 판결문 일부. 사진=서울행정법원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법원에서 최초로 장애인을 위해 쉬운 말로 쓴 판결문이 등장한 가운데 이를 법으로 규정하는 법안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11부(재판장 강우찬)는 지난해 12월 2일 원고인 청각장애인 A씨의 요청에 따라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을 구성했다. 전체 판결문 12쪽 가운데 첫 4쪽은 어려운 법률 용어 대신 실생활 용어로 쓰고 그림을 삽입한 것.

“알기 쉬운 용어로 판결문 써 달라” 요청에 응답한 재판부

A씨는 지난해 10월 22일 탄원서를 통해 “알기 쉬운 용어로 판결문을 써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고 재판부는 “장애인의 ‘당연한 권리’”라고 응답했다.

2022년 8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UN) 장애인권리협약 제2·3차 심의에 한국 사법부 대표로 참석한 강우찬 재판장이 이끄는 해당 재판부는 A씨 요청의 당위성을 상세히 설명했다.

재판부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및 UN 권고 의견에 근거해 판결문의 엄밀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지 리드(Easy-Read·단문 위주 문장 및 그림 등으로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문서 등을 제작하는 방식) 방식’으로 최대한 쉽게 판결 이유를 작성하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지난해 9월 9일 장애인 권리에 대한 인식 부족 및 협약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한국의 장애인 정책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총 79개의 권고 사항을 제시했다. 특히 사법에 대한 접근 (제13조)에 대해 권고했다. 위원회는 “사법절차 전 단계에서 장애인의 참여를 위한 법적·행정적·사법적 조치를 채택해야 한다”며 “법적 절차 전반에서 대안적 의사소통 수단 개발 및 모든 사법 시설에 대한 물리적 접근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지난해 12월 8일 국회에서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 가입동의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장애인의 사회참여 및 차별 철폐를 위해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의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이 이행되는 과정에서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도록 근거를 마련한 것. 선택의정서 제정은 2008년 UN장애인권리협약 채택 이후 장애계의 숙원 중 하나로 꼽혔다.

특히 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의 사법 접근권을 보장하도록 한다. 이미 우리 현행법은 장애인 사법 지원의 일환으로 점자 문서 및 수어 통역 등을 제공하고 있지만 소송 당사자인 장애인이 어려운 법률용어 등으로 인해 판결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해외는 어떨까. 영국 등 일부 국가에서 쉬운 판결문을 쓰는 전문 인력이 있지만 한국은 관련 제도가 없다. 영국은 정부 차원에서 지적 능력, 문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쉽게 쓴 글을 장려한다.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장애인 위한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 제공 의무화” 최혜영 의원 대표발의

최근 국내에서도 장애인이 소송 당사자일 경우 판결문 제공 시 사법당국이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작성·제공하기 위해 법 제도적 개선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월 13일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한 것.

최 의원은 1월 31일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실 저는 21대 국회 첫 등원 이후 지금까지 이해하기 쉬운 단어와 그림 위주로 구성된 이지리드 형태의 국정감사 결과보고서를 제작해 제공하고 있다”며 “장애인 역시 동등한 유권자로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어떻게 일하고, 또 어떤 결과를 냈는지 알려드리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어 “‘이지리드’ 판결문 역시 장애인 당사자가 제대로 판결내용을 이해하고, 또 본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고 덧붙였다.

그는 “장애인 기본권 증진을 위해 여전히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만, 특히 사법 분야의 경우 어려운 법률 용어 등으로 인해 장애인 본인이 소송 당사자가 되더라도 판결문을 이해할 수 없어 소송 과정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며 “이에 따라 ‘이지리드’방식의 판결문 작성 및 제공을 통해 장애인의 사법 접근성이 더욱 개선될 수 있도록 이번 개정안을 마련했다”고 법안 발의 취지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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