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우·감독 추상미
‘오펀스’로 8년 만에 돌아온 연극 무대
중년 남성 갱스터 연기로 호평
“남자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해석...
여성이 더 다양한 역할 맡아도 좋은 시대
젠더프리 캐스팅 넘어 새로운 각색 필요”

배우·연출·작가·엄마 역할 병행
보호종료청년 자립 다룬
TV 드라마 극본도 집필 중

배우·감독 추상미. ⓒ웰스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감독 추상미. ⓒ웰스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추상미가 연극 ‘오펀스’로 돌아왔다. 8년 만의 연극 무대다. 남성 캐릭터를 연기한다. 시카고 암흑가를 주름잡는 갱스터 ‘해롤드’다.

원작은 세 남자 이야기다. 고아 형제와 50대 갱이 함께 살며 서로를 돌보고 치유한다. 한국에선 2019년부터 여성들도 캐스팅됐다. 1983년 미국 초연 이래 첫 시도다. 김태형 연출이 강하게 밀어붙였다. “인간이 전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이야기라면 화자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는 중요치 않다. 여성의 입을 통해 전해질 때 또 다른 강력한 힘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반응은 뜨겁다. 여성들이 전면에 등장하자 익숙한 ‘아버지와 아들’ 서사에 흥미로운 균열이 생긴다. 가부장 이데올로기, 다소 신파적이던 원작에 새로운 느낌과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오펀스 여배 페어(여성 배우들 캐스팅)’가 볼만하다는 입소문이 났고 재관람 행렬에 매니아들도 생겼다. 원작자 라일 케슬러도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감탄했다. 

추상미가 이 작품을 택한 배경이다.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여성신문사에서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경순 배우가 해롤드를 연기할 때 보니 작품이 너무 좋았어요. 캐스팅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죠.”

지난 7일 공연에서 만난 추상미는 노련한 갱단 보스 그 자체였다. 거친 폭력배가 아닌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재치를 갖춘 캐릭터다. 몸에 잘 맞는 바지 정장 차림, 꼿꼿한 자세, 나직하고 정확하게 대사를 읊는 ‘추롤드’에게 반한 관객들이 적지 않다.

배우 추상미가 지난 11월29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개막한 연극 ‘오펀스’에서 해롤드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배우 추상미가 지난 11월29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개막한 연극 ‘오펀스’에서 해롤드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배우 추상미가 지난 11월29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개막한 연극 ‘오펀스’에서 해롤드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모티브히어로 제공
배우 추상미가 지난 11월29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개막한 연극 ‘오펀스’에서 해롤드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모티브히어로 제공

“‘남자’를 연기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남성적 에너지 표출보다는 고아로 자라 조직의 ‘세컨드’까지 올라간 사람의 내공, 연륜 표현이 더 중요하다고 봤어요. 해롤드는 신문을 끼고 살고 경제 흐름을 읽는 ‘브레인’이니까요.”

추상미가 보는 해롤드는 “상처 입은 치유자”다. “극의 배경인 시카고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압축판이에요. 고아들조차도 살아남으려 서로를 짓밟죠. 남을 죽이고 짓밟으며 올라선 해롤드는 결국 배신당해 쫓기는 신세가 돼요. 작가는 ‘경쟁이 팽배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 고아’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해롤드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은 고아 형제에 대한 연민, 자본주의 비판을 많이 표현해요. 죽기 전까지 형제를 돌보고, 이들이 갈라지지 않도록 위로하고 치유하죠.”

연습 과정이 쉽진 않았다. “저는 캐릭터의 내면을 창조한 후에 외형을 완성하는 타입인데요. 그래서 완성된 외형에 저를 맞추기가 어렵더라고요. 예를 들어 해롤드가 조폭이라서 남성적 에너지가 넘쳐야 한다는 설정을 납득하기가 어려웠어요. 마지막 연습까지도 헤매다가 극장 리허설, 첫 공연 때 딱 잡힌 것 같아요. 연출님이 첫 공연을 보고 ‘좋습니다’ 하고 박수를 보내주셨죠.”

극의 마지막, 죽어가는 해롤드가 트릿을 향해 처음으로 “딸아”라고 하는 장면도 관객들 사이에서 여러 해석을 낳으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여성 배우들로 채운 공연에서만 나오는 대사다. “99%를 차지하는 여성 관객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관객들도 호응했다. “한 관객분이 울면서 ‘나는 오펀스만 볼 거야’ 하시더라고요. 모든 페어를 다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배우마다 색깔은 다 달라도 늘 위로와 치유를 얻고 가실 거예요.” 2023년 2월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만날 수 있다.

배우 추상미가 지난 11월29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개막한 연극 ‘오펀스’에서 해롤드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배우 추상미가 지난 11월29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개막한 연극 ‘오펀스’에서 해롤드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젠더 프리 연극은 꼭 필요한 변화다. “남성 배우들이 모든 좋은 역할을 다 가져가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이 (남성이 맡던 역할을) 해도 무방하다, 여성이 해도 재밌겠다, 기회를 주자는 취지잖아요. 정말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 시대가 왔어요. 여성 관객이 훨씬 많고, 그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고요.”

틀을 깨는 다양한 캐스팅과 각색이 더 필요하다고도 했다. “남성을 캐스팅해야만 여성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캐릭터에 매료되고, 대리만족, 통쾌함과 짜릿함을 느낄 수 있어야죠. ‘오펀스’도 여성이 남성을 연기하는 것에서 나아가 아예 여성을 염두에 두고 각색해볼 수도 있겠지요. 관객들이 훨씬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 같아요.”

배우·감독 추상미. ⓒ웰스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감독 추상미. ⓒ웰스엔터테인먼트 제공

요즘 추상미는 TV 드라마 극본을 집필하고 있다. 자립하려 고군분투하는 보호종료청년들의 이야기다. 2018년 ‘폴란드로 간 아이들’로 첫 장편 영화 감독 데뷔에 성공한 이후 또 다른 도전이다.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 단지 물질적 자립이 아닌 진정한 ‘자립’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준비 중인 드라마, ‘오펀스’, ‘폴란드로 간 아이들’ 모두 ‘상처의 재해석’, ‘상처의 연대’에 관한 작품이에요. 상처 입은 사람들, 상처가 회복된 사람들이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을 돕는다고 생각해요. 제2차 세계 대전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한국전쟁 고아들을 돌보고, 해롤드가 고아 형제를 돌보듯이요.”

남편인 이석준 배우·연출과 공동제작한 연극 ‘스크루테이프’도 오는 1월6일 대학로에서 개막한다. 추상미는 연기, 연출, 제작, 작가 일까지 병행하기가 쉽지는 않다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아티스트로서 참 좋은 길”이라고 했다. “본질은 똑같아요. 살면서 느끼는 내 안의 목소리를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이죠. 앞으로 현실적이고 진솔한 여성 캐릭터를 더 많이 그리는 게 목표예요.”

초등 6학년 아들을 키우느라 바쁜 엄마이기도 하다. 아들은 마술사를 꿈꾸며 퍼포먼스를 연습해 사람들 앞에서 선보이고, 사람들이 연예인인 엄마 아빠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면 ‘저는요? 저도 TV에 나왔는데요!’ 하며 자신을 ‘어필’하는 깜찍하고 기운찬 어린이란다.

여성 후배들에게도 따스한 조언을 보냈다. “꿈을 크게 가졌으면 좋겠어요. ‘젠더 프리’ 극처럼 새로운 시도는 계속 이어질 것이고, 새로운 기회가 올 거예요. 전 세계적으로 그런 흐름이 확장되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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