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불량식품의 천국에다 스트레스의 왕국인 대한민국에 살면서도

사람들 수명은 자꾸자꾸 길어져만 가니 정말 불가사의 아냐?

'먹을 거 갖고 장난치는 놈들은 극형에 처해야 해!'

이제 막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것 같다. 당시 군대에 납품하던 간장을 바닷물에 색소를 타서 만들었다는 기발한 장사꾼 이야기를 하면서 어른들이 분노하던 장면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먹을 것 갖고 장난치면 들어오는 돈의 크기에 비해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미약했던 탓인가 보다. 내가 철든 이래로 최근의 만두파동에 이르기까지 불량식품의 역사는 끈질기게 지속되어 시시때때로 수면으로 떠오르고 그때마다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이내 가라앉는 일들이 되풀이되어왔다.

잊을 만하면 떠올라 분통을 터뜨리게 만드는 단골식품은 단연 두부와 콩나물이었다.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게 된 이래, 거창하게 표현하면 내 살림의 역사가 개통된 이래 두부와 콩나물만큼 자주 사들이는 식품은 없었다. 요즘은 우리 부엌이 거의 개점 휴업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문을 열었다 하면 으레 두부는 최우선 순위다. 두부로 어떤 요리를 만들어 먹느냐고? 요리는 무슨. 그냥 숭덩숭덩 썰어 간장(양념간장도 아니다. 순수한 진간장) 찍어 먹지.

그런데 이렇게 좋아하는 두부를 몇십 년 동안 열심히 먹으면서 그나마 마음을 놓은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물론 요즘에도 가끔 두부가 말썽을 일으킬 때도 있다. 하지만 수입콩을 국산콩으로 둔갑시켜 두부 값을 비싸게 매기는 일쯤은 두부를 제대로만 만들었다면 차라리 애교로 봐줄 수 있다.

TV를 보며 맛있게 두부를 먹고 있는데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더러운 지하수를 끌어 올려 두부를 만드는 장면, 단 한 초라도 빨리 굳으라고 석회를 섞는 장면이 방영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콩나물도 막상막하였다. 내가 지금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게 수은콩나물이라는 말인데, 아무튼 몸에 치명적인 손상을 준다는 그 수은콩나물은 언제부터인가 농약콩나물이란 말로 대체되기까지 참으로 끈질기게 버텼던 것 같다. 콩나물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부지런한 주부들은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어야겠다면서 콩나물 재배기를 사기도 했다(나 같은 게으른 주부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지만). 그런데 이 콩나물 재배기는 대부분 이내 용도 폐기되었다. 직접 키워 먹으니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비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콩 값도 비쌀뿐더러 아무리 정성들여 물을 주어도 콩나물이 가늘고 비실비실한 게 영 볼품이 없다고들 했다.

그러니 불량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불량의 정도가 그저 참아줄 만하기만을 바라면서 예쁘고 실한 콩나물을 사먹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에는 유기농 콩나물 또는 무농약, 무공해 콩나물을 따로 비싸게 파는데, 그렇다면 다른 일반 콩나물은 유해 콩나물이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셈인가.

얼마 전에는 메밀국수를 삶아 먹으려고 사다놓았는데 며칠 후 뉴스를 보니 머리 좋은 업자들이 메밀 색깔을 내기 위해 숯가루를 섞었단다. 요즘은 숯도 건강에 좋다는데 그쯤이야 어때 하면서 너그럽게 받아들이려고 애쓰는데, 이런, 몸에 해로운 공업용 숯을 넣었다는 것이다. 이건 좀 거시기하군.

역사적으로 보면 나는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엄마 손맛을 단절시킨 최초의 여성세대라고 지탄받아 마땅하다. 다른 건 다 사 먹어도 우리네 된장 고추장 김치만은 집에서 담가 먹어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을 일찌감치 거역한 불량주부이니까. 그러나 그 동안 내가 마음이 불편했던 건 전통단절이나 엄마노릇에 대한 비난 때문이 아니라 그런 식품을 사먹으면서 마음 한 가운데에서는 언제나 방부제나 유해색소 혹은 불량고춧가루에 대한 불안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21세기라는데, 이젠 정말 그 따위 근본적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입맛대로 골라 먹는 재미를 누리고 싶다. 그런데, 참, 불량식품의 천국에다 스트레스의 왕국인 대한민국에 살면서도 사람들 수명은 자꾸자꾸 길어져만 가니 정말 불가사의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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