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마이 라이프]
회고록·수채화 모아
『경옥이 그림일기』 펴낸
이경옥 동구바이오제약 회장

아이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다
창업주 남편 사망 후 대표 맡아
외환위기 파고 속 회사 지켜
“결핍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계속 배우고 싶은 마음만은 청춘”

[브라보 마이 라이프] 100세 시대, 놀라운 에너지로 자신의 삶을 가꾸는 노년층이 등장했다. 노년이 무력하고 정체된, 더 이상의 변화나 발전이 없는 삶의 단계를 뜻하던 시대는 지났다. 나라와 사회의 발전을 이루고, 세계 최고의 인재를 길러낸 열정이 자기 자신의 삶을 가꾸기 시작할 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편집자주]

이경옥 동구바이오제약 회장이 6일 서울 송파구 동구바이오제약 본사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이경옥 동구바이오제약 회장이 6일 서울 송파구 동구바이오제약 본사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이경옥(83) 동구바이오제약 명예회장은 70대에 처음 붓을 잡았다. 작은 스케치북 속에서 붉은 태양이 솟고 매화가 피고 새들이 날았다. 그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져 이젤 앞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올해 첫 그림 에세이를 펴냈다. 『경옥이 그림일기』(푸른사상)는 겨울 햇살처럼 포근한 회고록이다. 화려한 수식어나 자화자찬은 없다. 여성 CEO의 도전과 성공 이야기도 강조하지 않는다. 삶의 자잘한 기쁨과 슬픔, 못다 이룬 꿈과 못다 전한 말들을 담백하고 서정적인 그림과 글로 풀어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따뜻한 수채화에 한 번 더 시선이 머문다.

“나는 화가도 작가도 아니다. 그저 여든세 해의 삶을 그림으로 글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그림일기지만 그림도 글도 평가가 두려웠다. 밀린 방학 숙제를 제출해야 할 시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쉴 사이 없이 인생을 쓰고 그리면서 하루가 짧았지만 내 생애 어느 때보다 참으로 행복했다.” (『경옥이 그림일기』 서문 중)

이경옥 동구바이오제약 회장의 『경옥이 그림일기』(푸른사상) ⓒ푸른사상
이경옥 동구바이오제약 회장의 『경옥이 그림일기』(푸른사상) ⓒ푸른사상

2021년 10월부터 안양 화실에서 배우고 그린 그림들을 모았다. 특히 소나무를 좋아해서 화폭에도 많이 옮겼다. 경주 배동 삼릉의 소나무를 그린 수채화를 보여주며 그가 말했다. “사시사철 푸르고 다른 나무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껍질이 좋아요. 혹독한 겨울을 견디면서 그렇게 단단하게 몸에 새겨지는가 싶어요.”

이 회장은 어릴 적부터 붓글씨, 드로잉 등에 소질을 보였다. 사는 게 바빠 미루기만 하다 70대에 캔버스 앞에 앉았다.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분을 만나 아크릴화에 처음 도전했어요. 풍경화, 정물화를 그리다가 인사동에서 어반스케치, 크로키를 배우고 더 많은 그림을 그리게 됐지요. 인천여고 총동문회 미술동문 모임이 여는 ‘녹미전’에도 참여했고요. 주변에서 나더러 아깝다고, 전시회를 한번 열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아주 초보인데. 하하. 미수(88세)에 해볼까 했는데 그때까지 내가 건강할지 알 수 없잖아요.”

약 1년 만에 책을 펴냈다. “우리 막내는 눈물 난대요. ‘이거 다 엄마가 그린 그림이야? 엄마 참 잘했네. 훌륭해.’ 나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그땐 그랬지’ 공감하고요.”

이경옥 동구바이오제약 회장이 6일 서울 송파구 동구바이오제약 본사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그동안 그린 수채화를 보여주고 있다.   ⓒ홍수형 기자
이경옥 동구바이오제약 회장이 6일 서울 송파구 동구바이오제약 본사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그동안 그린 수채화를 보여주고 있다. ⓒ홍수형 기자

책은 격동의 근현대사를 헤치며 살아온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4후퇴 때 피난길에서 가족들과 헤어질 뻔한 일,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팔남매를 키운 어머니에 대한 사랑, 젊었을 땐 대학 대신 직장에 다니며 실질적 가장 노릇을 했고, 결혼해서는 제약기업 창업주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바쁘게 살았던 나날들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남편이 병으로 쓰러지자 이 회장은 1992년 부사장으로 경영에 뛰어들었다. 1997년 남편이 사망한 후 대표이사가 돼 회사를 이끌며 외환위기 파고를 넘겼다. 2017년 아들 조용준 대표이사 단독대표 체제로 전환한 후에도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WCPM(세계 CEO전문인 선교회) 상임회장, 사단법인아시아포커스 이사장, 이영회연합회 상임고문으로도 활동 중이다.

그의 헌신 덕에 동구바이오제약은 오늘날 국내 피부과 처방 1위, 올 상반기 매출 960억원, 영업이익 102억원을 달성한 상장기업이 됐다. 피부·비뇨기질환 의약품과 예방·진단·치료·관리를 아우르는 토털헬스케어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가 이 회장의 신조다. 회사 일로 바쁠 때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이화여대 경영대학원, 전국경제인연합회 최고경영자과정에 등록해 틈틈이 경영 수업을 받았다. 집안 형편 때문에 기회를 놓쳤을 뿐, 배움에 대한 열망을 놓은 적 없다.

“결핍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어요. 부족한 나를 채우려는 열정 덕에 아버지와 남편을 여의고 IMF를 겪으면서도 회사를 지탱해내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난 아직도 청춘이거든! 이 나이에 다 귀찮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가고 싶은 전시, 음악회도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그는 후배들에게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려면 끊임없이 지식과 지혜를 쌓아야 한다. 어떠한 역경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지혜를 모으고 성실하게 해나가면 극복할 수 있다. 오늘의 생각과 행동을 바르게 해야 내일 좋은 미래가 열린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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