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한 영화 읽기]
영화 ‘놉’이 그린 우리 시대의 영웅
‘아무것도 아닌 자’의 운명에 저항하는
흑인 레즈비언 주인공 에메랄드
방종하고 자신만만한 ‘돌아온 탕아’
마지막 일격 가하며 진짜 영웅으로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조던 필 감독의 영화 ‘놉’ 주인공 남매 중 여동생 에메랄드.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조던 필 감독의 영화 ‘놉’ 주인공 남매 중 여동생 에메랄드.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5년 전 조던 필 감독은 블랙 호러라는 낯선 장르를 한국 관객들의 뇌리에 강렬히 각인시키는 데에 성공하면서 메타포와 프로파간다의 노련한 대가임을 입증했다. 신작 ‘놉’ 역시 풍부한 상징을 통해 무척이나 뚜렷한 메시지들을 전달하는 영화다. 역사에 마땅히 기록되었어야 했으나 잊혔던 ‘주변부의 존재들을 다시 주인공으로 불러오겠다는 다짐. 스펙터클을 향한 대중의 맹목적 사랑에 대한 경고.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생존하려면 영화의 원류로 회귀해야 한다는 위기감의 공유.

주인공 헤이우드 남매부터가 ‘인류 최초의 필름’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흑인 기수의 후손이고, 백인 중심의 할리우드에 말을 공급하는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그 혈통을 무기 삼는 인물들이다. 이렇듯 ‘놉’은 영화 산업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지 못하고 카메라의 시선 바깥으로 밀려 나간 소수자에 대한 경의 섞인 복원이자, 그 ‘밀려 나간 자’에 인간 약자뿐 아니라 동물(원숭이 고디와 말 럭키)까지 포함하는 사려 깊은 시도다.

그런데 영화의 원류인 서부극으로 돌아가는 동시에, 주류이자 디폴트로 여겨진 것과 주류에서 배제되었던 것의 경계를 흐리려는 시도 자체는 최근의 영화계에서 드물지 않았다. 켈리 라이카트의 ‘퍼스트 카우’와 제인 캠피온의 ‘파워 오브 도그’를 필두로 한 ‘소수자에 의해 전유된 서부극’ 장르는 이미 전 세계적 유행의 흐름을 탔다. 그 와중 ‘놉’의 특별함을 찾자면, 흑인 ‘남성’ 감독이 인간-비인간, 백인-비백인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 사이의 벽까지 부수는 일을 주저치 않았다는 지점에 있다. ‘놉’의 주인공 남매 중 여동생 에메랄드(엠)가 얼마나,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돌출된 존재인지를 생각해보자.

조던 필 감독의 영화 ‘놉’ 주인공 남매 중 여동생 에메랄드.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조던 필 감독의 영화 ‘놉’ 주인공 남매 중 여동생 에메랄드.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엠은 신중하고 고지식한 오빠 OJ와 정반대인 품성을 갖고 있다. 엠은 사교적이고, 대담하고, 기회주의적이고, 자신감 넘치고,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했고, 바람둥이다. 그는 돌아온 탕아이며, 죽은 아버지를 여전히 원망하고 있다. 전통적인 (남성) 영웅 서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개인사다. OJ가 성장하는 영웅이라 친다면, 엠은 완성형 영웅인 셈이다.

여기에 동시대인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자본주의적 욕구가 얹어진다. 그는 ‘오프라 샷’을 찍어 ‘아무것도 아닌 자’의 운명에 정통으로 저항하려 한다. 엠은 노골적이고 탐욕스러운 꿈을 오빠에게도 전염시키며, 축적의 욕망을 향해 용감하게 투신한다. 게다가 엠은 처음 보는 여자라도 예쁘면 주저 없이 플러팅하고 도시마다 여자가 있는 사람이다. 등장부터 영화의 그 어떤 남성 인물과도 성애적으로 관계 맺지 않을 것임을 약속해주는 여성 인물은 영화사적 측면에서도 드물고 귀하다.

그간 정통 SF 호러 장르에서 이다지도 방종한 흑인 레즈비언의 ‘생존율’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따지기 전에, 흑인 레즈비언 여성이 얼마나 ‘보였는지’조차 우리는 제대로 답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그런 인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조던 필 감독의 영화 ‘놉’ 주인공 남매 중 여동생 에메랄드.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조던 필 감독의 영화 ‘놉’ 주인공 남매 중 여동생 에메랄드.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조던 필은 비가시화됐던 흑인 레즈비언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그치지 않고 그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진짜 영웅’ 자리를 내어주기까지 한다. 진 재킷을 구름 밖으로 끌어내어 사진을 찍으려 하는 클라이맥스 장면 전체가 영웅 지위의 완벽한 승계를 비유하고 있다. 말을 탄 OJ가 백인 남성 취재기자 때문에 카메라의 시선을 또다시 빼앗겼다가 그것을 회수했을 때, 공석이었던 주인공의 자리는 OJ가 아닌 에메랄드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오토바이를 탄 백인 남자, 그를 좇는 홀스터의 카메라는 소수자의 기회를 다시금 뺏어가려는 기존의 백인-남성 중심주의적 체제(정). OJ는 최초의 영화 주인공의 환생과도 같은 흑인 남성 기수(반). 그리고 에메랄드는 주인 없는 오토바이를 탄 흑인 여성, 즉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영웅(합).

OJ는 결말에서 말을 타고 진 재킷의 시선을 돌려 엠을 안전하게 빼돌리기에 성공하는데 이는 (OJ가 바랐던) 엠의 생존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선택이 됐다. 엠은 백인 남자의 오토바이를 대신 타고 달려, 자기 아버지를 죽인 물체인 동전을 그대로 가져다가 반격의 무기로 쓴다. 결국 진 재킷을 해치운 것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필름 사진을 찍은 것도 에메랄드의 기지 덕분이었다.

이 그림을 통해 조던 필을 달리 보고 싶어졌다. 이전 시대에 착취당하고 침묵을 강요받았던 사람들은 흑인 남성뿐 아니라 흑인 여성도 있었단 걸 잊지 않은 조던 필의 눈이 비로소 엠을 향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면 마땅히 여성이어야 한다는 시의적절한 판단, 영화사에서 무시되어 온 여성의 시선(female gaze)에 대한 존중이 ‘놉’의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다고 믿고 싶다.

유해 작가는

회사원. 영화 읽고 책 보고 글 쓰는 비건 페미니스트. 브런치: https://brunch.co.kr/@yoo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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