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덕 초상화
김만덕 초상화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은 조선 역사상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남긴 여성이다. 제주에서 태어난 김만덕은 10여 세에 부모를 잃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자 어느 기생의 수양딸로 들어갔다. 김만덕이 나이가 조금 들자 관아에서 그 이름을 기생 명단에 올렸다. 기생의 신분은 천인이었다. 김만덕은 스물이 넘자 본인이 양인임을 관아에 호소해 가까스로 기생에서 벗어났다.

그 후 김만덕은 독신으로 지내면서 객주 집을 운영했다. 객주는 숙박업의 일종이나 상인의 물건을 보관하거나 위탁받아 거간하는 중간상 역할도 가능했다. 김만덕은 장사에 수완을 발휘해 물건이 흔하고 귀한 때를 잘 이용해 시세 차익을 남겼다. 점차 객주가 번창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했다.

1977년에 제주시 건입동 710번지(속칭 ‘가으니 마루’)에 있던 묘를 이장해서 이 기념탑 아래에 안장했다. 모충사 경내에 있다.
1977년에 제주시 건입동 710번지(속칭 ‘가으니 마루’)에 있던 묘를 이장해서 이 기념탑 아래에 안장했다. 모충사 경내에 있다. 사진=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제공

만약 김만덕이 사업가에 그쳤다면 그 이름 석 자를 역사에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김만덕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1792~1795년에 제주는 연이은 흉년으로 어려웠다. 조정에서 급히 구호 곡식을 보냈으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그마저 1794년에는 풍랑으로 도착하지 못하고 말았다.

1795년에 김만덕은 굶주린 이웃을 위해 본인 재산을 희사했다. 전라도 상인에게 급히 양식을 사서 보내라고 부탁하고 온갖 방법으로 배편을 마련해 제주로 실어 왔다. 그 규모가 500여 섬이었다. 당시 몇몇 제주 사람이 기부한 규모가 100~300 섬 미만이었다고 하니 김만덕의 기부는 고액 기부였다.

이듬해 제주 목사는 김만덕의 일을 정조에게 보고했다. 그 일을 훌륭히 여긴 정조는 소원을 들어주라는 특명을 내렸고 고사 끝에 만덕은 한양 대궐과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국법은 제주 여성이 육지로 나오는 것을 금지했다. 제주 인구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려는 정책이었다.

‘가으니 마루’의 묘에 있던 묘비와 동자석, 망주석 등의 석물이다. 현재 ‘김만덕 묘탑’의 맞은 편에 옮겨 놓았다.
‘가으니 마루’의 묘에 있던 묘비와 동자석, 망주석 등의 석물이다. 현재 ‘김만덕 묘탑’의 맞은 편에 옮겨 놓았다. 사진=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제공

그래서 정조는 김만덕에게 특별히 ‘내의원 의녀’의 직책을 내려 서울로 오게 했다. 이때가 1796년 가을, 나이 57세였다. 서울로 온 김만덕은 궐에 들어가 왕비에게 인사를 드리고 큰 상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늦봄에 금강산을 구경하고 제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김만덕을 잊지 않고자 했다. 당대 유명한 정치가 채제공은 김만덕에게 ‘만덕전’을 지어 선물로 주었다. 1840년 제주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도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의 빛이 세상에 퍼지다)’라 써서 그 후손에게 주었다. 이 말대로 김만덕이 보여준 기부의 힘이 오늘날까지 빛을 발하고 있다.

*[신화와 역사 속 여성 리더십] 칼럼은 전라남도 양성평등기금의 지원을 받은 (사)가배울 살림인문학 아카데미  강연의 요약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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